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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Apr 03. 2024

산수유 마을에서 첫사랑을 만나다

눈부신 날에 성큼 



24살의 첫사랑들을 만났다.

산수유 가녀린 꽃술이 축포처럼 터져 오른 띠띠미 마을



햇살은 바람을 따라 가지에서 여울지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는 배불뚝이 중년들 

걸음도 느리고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하다 

바위만 한 뱃집을 앞세우고 낯설음이 오고 있다

둥글둥글한 얼굴엔 발그레한 수줍음이 물결져

수줍음이 흐르기는 나도 마찬가지

30년도 더 넘은 세월이 우리 사이를 걸어오고 있다.


선생님, 제 늦둥이 셋쨉니다. 흐흐.

엄마 아빠와 함께 먼 곳까지 온 여섯 살배기가 나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근데 누구예요? 한다. 

순식간 작은 공처럼 통통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사방이 신기방기한 듯 쉴 새 없이 물어대는 이 귀염보숭이, 눈을 뗄 수가 없다. 



산수유 꽃술처럼 온 얼굴로 웃는 이 늙은 아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눈부터 웃고 눈 끝에 오래 웃음이 남는다. 제 아이처럼 정말 산수유 노란 꽃술을 많이 닮았다. 

장가 대신 직장과 사진으로 애인을 삼은 키 큰 늙은 아이는 카메라 가방을 짝으로 데려왔다. 터트리는 것 없이 씨익 미소를 짓고, 수줍으나 표현이 분명했던 이 친구는 여전히 당당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또, 눈이 유난히 맑아 하늘빛을 다 담아낼 것 같던 눈 큰 아이는 군수선박 배선감독을 하며 성실한 가장으로 욕심 없이 살아간다. 동글동글한 웃음이 여전히 주위를 편안하게 한다. 자녀들이 커서 이제 부모와 동행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한다.


모두 이 눈부신 날 자신의 세월을 데리고 와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조금은 느긋한 미소로 천천히 길을 걷는다.

꿈도 꾸지 않았던 이 시간이 꿈속 같다.



내 나이 24살, 그때 아이들은 14살.

성수를 이루었던 탄광업이 내리막길로 치달으며 이동과 사고가 많던 탄광촌 읍내. 학생들은 가난하고 불안정했다. 우리는 학교 도서관에 모여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꿈을 꾸었다. 낡은 도서관 벽 족자에는 지금은 기억이 어렴풋해진, 김형석 님의 이런 에세이 글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책 속에는 길이 있고, 책 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책 속에는 위대한 스승이 있고, 책 속에는 혁명이 있다.


 우리는 그 글을 거울삼아 부지런히 모여들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당시 이 글은 선생도 학생도 천방지축이던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 뜨겁던 여름방학날 12명의 아이들과 함께 2박 3일 무전여행을 겁도 없이 떠났으니까. 

하늘재를 걸어서 송계계곡에 닿고, 물소리를 퍼서 라면을 끓이며 목청껏 노래하고, 민박집에서 자고 난 다음날 또 걸어서 탄금대까지, 임진왜란 때 여기서 배수진을 치고 패한 신립 장군을 안타까워하며, 마침내 중원고구려비에 다다랐을 때의 그 감개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걸어서 중원까지 갔다 온 뒤, 우리의 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내와 극복의 미래가 되었다.


열네 살이 꿈꾸던 먼 미래의 시간,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오늘이지만 장성한 시간의 강 너머를 보면 알 것도 같다. 첫사랑들이 뿌리내린 지난날들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얼마나 굳건하게 벼텨냈는지 그래서 이 뱃집과 웃음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나는 또 어떠한지. 마음이 뭉클하다.

쉰을 눈앞에 두고 세월을 성큼 건너와 우리는 다시 오늘, 새로이 젊은 한 장면을 찍는다. 

오늘은 또 먼 어느 날의 그때가 되어 푸근한 옛사랑의 기억이 될 것이다.

소중한 하루가 산수유 바람결을 타고 먼 시간으로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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