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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Mar 28. 2024

기다림의 마음

희망과 절망의 유예

기다림은 때론 설렘이고 희망이며, 때론 절망의 유예이다.


내 어릴 때 기다림은 희망이고, 기대이고, 설렘이었다.

명절을 기다려 새 옷을 얻게 된다거나 세뱃돈을 받기도 하니 그날이 얼마나 기다려지던지. 또 소풍이나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릴 때의 부푼 가슴에는 한아름의 놀잇감과 과자, 진기한 새 물건들, 평소와 다를 생선반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산골에 살던 어린 시절, 진달래 화창하게 피어나던 따스한 봄날에 나는 5일장을 기다려 엄마를 따라 읍내장에 갈 거라고 벼르고 별렀다. 

엄마 손을 잡고 북적북적한 장을 구경하며 놀이공도 사고, 고무줄도 사고, 그때그때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하며 졸라 보려고 장날만을 기다렸는데, 정작 그날 엄마는 버스에 올라타는 나를 기어이 떼어 놓고 겨우 문이 닫히는 버스를 타고 혼자 가버리셨다. 울며 울며 버스가 지나간 먼지 나는 신작로를 따라가며 나도 엄마 가신 장으로 가겠다고 한참을 가다가 길모롱이 우묵한 곳에서 돌아오고 말았다.

온종일 외가 마루 끝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따라가지 못한 원망을 안은 채 그래도 엄마가 어서 돌아오길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날이 이슥해지도록 장에서 돌아오는 버스는 오지 않고,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깜깜한 밤. 엄마는 아직 안 왔냐고 울음 참은 목소리로 외할머니께 대답을 듣고는 나는 와앙 울어버렸다. 

     "엄마는 집에 가고 없어. 니가 곤히 잠 들어서 올라갔는데, 내일 데리러 온단다."


     어찌 그럴 수 있나. 엄마는 장에도 못 따라 가게 해놓고, 애 터지게 기다리는 나를 그냥 두고, 우째 혼자. 


서럽고 분하고 억울하여 울면서 그 깜깜한 밤중에 산중 집으로 올라가겠다고 떼를 써댔다. 

외할머니는 니가 잘 자고 나면 엄마가 올 거라고 했고, 외숙모는 니가 울고 떼쓰면 엄마가 데리러 안 올 거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 밤, 내 기다림의 보상이 깨진 억울함과 엄마가 나를 두고 가버린 서러움에 떼를 더 쓰다가 지쳐 잠이 들었던가 보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집으로 가겠다고 나서니,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먼 산골짜기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그때 우리 집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산 중턱에 있는 외딴집이었으니,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애가 혼자 가기엔 너무 위험스런 곳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전날의 서러움을 가지껏 내어 놓았다. 그때 떼쓰는 나를 환히 달래던 엄마의 발그레한 웃음은 아직도 선하다. 나는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만 데리고 간다 해 놓고, 왜 그랬어? 거짓말하고.... 내 공은?"

엄마는 

"요기 봐라. 니 공 아껴뒀다 주려고 그랬제."

물론 공과 덤으로 새 신을 받아 들고는 쪼여있던 내 마음은 솨아 풀어졌다. 너무 쉽게 풀어진 것 같아 조금은 또 억울했지만, 내 기다림의 끝에는 놀이공과 뜻밖의 새 신 그리고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이란 것이 있었다. 버스는 너무 미어터졌고, 집으로 가는 산길은 너무 깜깜했으니까.

돌아보면 기다림은 설렘이고, 기대이고, 뜻밖의 선물이 따르는 행운으로 은연중에 자리 잡았다.


20대의 기다림은 희망이고, 신념이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나름 혼신을 다해 운동을 하던 대학시절과 시골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기다림은 별빛을 잃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 기다림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시절을 통과했을까 싶다. '이 아이들이 올곧게 자라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거야!'라는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살림이 팍팍하여 힘들 때도, '언젠가는 좋아질 날이 올 거야' 라며 참고 기다렸다. 악착같이 성실하게 살았다. 성실 근면한 생활인이어야 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 외에 더 있었을까. 그런 나의 30, 40대의 기다림은 거의 수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이 50을 넘어서고, 세상도 질풍같이 변화무쌍해지면서 나는 기다림을 내려놓았다. 

예전에 이성부 시인은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당위적으로 오는 봄처럼, 늘 우리는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딘 끝에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것이 기다림마저 잊은 '봄'이라면, 봄은 삶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위적으로 오는 것이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기다림에 지쳤고, 기다려도 오지 않고, 기다림을 버려도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50을 넘어서도, 맞벌이를 하면서도, 은행빚을 떠나본 적 없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마음으론 불행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겠다 싶어 마음을 바꿔 먹었다.


   까짓 껏, 은행은 써먹으라고 있는 건데, 내가 왜 절절 매? 은행 빚 좀 있으어때. 우린 부지런히, 정직하게 살았는데, 신용불량은 아니니 괜찮아, 까짓 껏. 


기다림에 지쳤더라도 현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니까, 그것이 순리니까 결국은 무엇이든 싸움을 한 판 하든, 게을러 자빠져 있다가 일어나든, 삶의 순리를 어기지 않는다면 굳이 희망을 부여하지 않아도 삶은 자체가 기다림이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나는 기다림을 버리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기다림에 대한 생각도 끊어져 버린 지난 5년, 세상을 잃어버린 텅 빈 시간을 지나, 

지금 다시 새로이 기다림을 생각한다.

순수했던 젊은 날의 기다림이나 생활인으로서의 기다림이 아니라 자식의 일을 앞둔 부모의 기다림이다.


나는 지금 불안과 초조의 기다림에 봉착해 있다. 

딸은 올해 나이 서른이다. 공시생 3년을 지나 취준생 3년째다. 물론 그사이 인턴 기간들도 있었지만 아직도 취준생의 취업 노역 속에 있다. 20대를 거의 취업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 공부 5년 동안과 그리고 다가올 취업 시즌을 생각하면 긴장의 연속이다. 얼마나 힘들까. 딸의 청춘이 다 가고 있는 것 같아 쓰리고 쓰리다.

합격까지의 노력이 남보다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고, 시험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 해 취업의 계절이 되면 합격까지는 긴장과 불안의 기다림이 된다. 

공부한 만큼 실수 없기를, 그날 운이 좋아 남달리 맑아지기를, 알 수 없는 먼 조상의 음덕으로라도 행운이 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무엇에든 붙잡고 더 이상 고통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빈다. 간절한 기다림 속에 깔린 두려움을 필사적으로 몰아내면서 내 눈빛은 웅숭깊은 먼 산이 된다.

시험에 실패하는 동안, 딸은 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마음을 감당하며 서로에게 힘듦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자식일을 두고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초조와 불안이 올 줄 몰랐다.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좋게 마음먹어도 합격을 기다리는 이 마음은 딸의 고생을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이것이 부모 된 '죄'인가 싶기도 하다. 부모가 되어선 죽을 때까지 마음 한 곳에 자식이 있을 것이니, 바위틈에서 마르지 않고 나오는 물줄기 같다. 드러나지도 않고 덜어낼 수도 없는 발원지다.


그러나 기다림에는 절망이 없다. 절망한다면 기다림은 아예 시작이 되지 않을 테니. 

그래서 기다림은 간절한 기도이고, 절망의 유예이다. 자식을 기다려 주는 마음에 흔들림 없이, 불안감 없이 평정심을 찾아야 하는 부모가 하는 마음수행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갖추어야 할 기다림의 자세임을 깨닫는다.

기다림도 나이를 먹나 보다. 

기다림은 마음수행의 다른 이름인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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