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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Mar 08. 2024

진정 애달픈 꿈이라면

생기의 불씨

현실에서 갈구하는 이 애달픈 꿈을 어찌해야 할까요.


얼마 전 명리재능기부 특강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자기 힘으로 70억을 벌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고 돈이 될 만한 일이 자꾸 눈에 들어와 진짜 열심히 일했는데, 유통사업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 되어 주변의 권유로 더 확장하게 되었대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잘 나가던 사업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어 지금은 몹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언제쯤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잘 될 수 있는지 궁금해했어요. 

명리강의 선생님은 다음 대운에서 다시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할 것이라고 풀어주었죠. 이 사람은 자기 일을 위해서 사주명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요. 참 대단하지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일했고, 지금도 늦은 나이지만 노인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한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에게 내재된 기운을 쓰며 실패해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거죠. 다음 대운에서 쓸 수 있는 실력을 부지런히 갖추는 과정이라고 해요.

거기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명리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운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살피기 위해서라죠.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 것 같았어요. 요행을 바라고 온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패와 좌절은 없을 테니까요. 


명리에서는 사람마다 꿈꾸는 것이 다른데, 타고난 명이 그 사람을 그런 꿈으로 가게 한답니다. 

그 사람의 꿈은 돈이었어요. 돈을 잘 벌 수 있는 명을 타고난 것이지요. 그런데 운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라 좋을 때와 안 좋을 때, 말하자면 흐름을 타기 때문에 그때를 잘 알아야 된다고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운발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죠. 그래서 애달픈 각각의 꿈이 언젠가 한 번은 좋은 때가 왔거나 온다는 것이지요.


그릇의 크기도 제각기 달라 넘치면 흐르게 되어 온전히 제 그릇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지요. 좋은 운을 만나 내 세상이다 싶어도 과유불급이라 넘치면 사람이 다치게 되어 있는 게 세상 이치인가 봐요. 우리같이 보통의 사람들은 넘치도록 살지도 못해서 남의 이야기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말하는 것, 먹는 것, 소유하고 싶은 것, 사랑받고 싶은 것 등등 시시때때로 과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죠. 그래서 '알아차림'은 나를 지키는 기본 선이죠. 

꿈도 그래요. 애달프디 애달픈 꿈이 욕심이 되면 나를 다치게 하니 다만 나를 알아차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나의 명에 주어진 70%의 운이 지나갔다 하더라도 꿈꾸는 것은 멈출 수 없죠. 그것이 욕심이 아니라면, 진정 애달픈 꿈이라면 나에게 있는 이 꿈을 갈고, 닦고, 노력하며 흘러 흘러가는 것이 사는 일 아닐까요. 그러니 더 바랄 게 없죠. 애달픈 나의 꿈을 두고 결과를 먼저 생각할 순 없는 거지요. 꿈이 있어 다행이라면 말이죠.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고 일어나게 될 테니까요.




나에게는 이 애달픈 꿈이 무엇일까요. 

생각해 봅니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 나는 소설 습작에 열심이었요.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며 기본적인 생활살이가 내 삶의 중심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삶은 충족되지 않았고, 무언가 늘 부족한, 헛헛함이 있었어요. 삶에 충실하다고 갈구가 없어지진 않았죠. 안타깝고 초조한 그 무언가가 나를 괴롭혔어요. 그래서 10년 전 즈음 소설 필사를 시작했지요. 중심 생활을 제외하면 거의 소설에 탐닉했어요. 등단을 꿈꾸며 말이죠.


그러다 남편이 암 진단을 받았고, 나는 그것이 마치 내 죄인 양 자책하며 남편을 살리기 위해 매달렸어요. 그러나 끝내 사별이 오고 말았죠. 

사별의 끝에서 소설 따위, 글 따위, 이런 꿈 따위는 내게 아무 소용없는 헛된 꿈이었고, 나는 지독하게 글과 멀어졌어요. 의도가 아니라 그냥 저절로 꼴도 보기 싫어진 거죠. 책도 읽을 수 없고, 글쓰기란 아예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시시한 일이었어요. 모든 원망을 '글쓰기'에 쏟아부었어요. 글쓰기 하느라 남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정신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별 후 나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한 점 바람이었어요. 


벌판에 유폐되었던 내 마음도 5년 세월이 흘러갔네요. 직장도 그만두고 나는 황야에 버려둔 내 마음에게 물었어요. 

  '넌 누구냐. 

   삶도 죽음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로 거기 그러고 있나.'


내가 누구인지, 삶과 죽음이 무언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아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안다고 생각했던 지난 것들이 모두 무위로 돌아갔어요. 그때 일상 평범한 한 사람이 어떻게 남은 삶을 대해야 하는지, 그런 가녀린 반성이 들었어요. 그래서 반성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고맙게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이 나의 아궁이가 되어 주었지요. 운명처럼 브런치에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묻어두었던 애달픈 꿈이었나 봅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지워버렸던 애달픈 꿈이 내 생기의 끈이 되어주고 있어요.

이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살리고 싶어, 꺼질만하면 풀무질을 해서 본래의 나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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