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아나무 Mar 06. 2024

애달픈 꿈

현실을 끌어안다

꿈꾸는 자는 애달프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실체가 무언지 잘 드러나지도 않는데, 안타깝게 갈망한다. 그것이 도대체 무언지 애달프기만 하다. 

힘없이 쓰러져 있을 때도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그래서 더 절망하고, 주저앉고, 그러다가 외면한다. 그러나 가슴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그것은 나를 떠나지도 않으나 현실에선 잘 꺼내어지지도 않는다. 갈망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것이 뭐길래.

무얼 꿈꾸어 헛헛한지 아스라한데 지금은 가물가물해져 가는 거울 앞에서, 이것이 인생인가 하고 묻는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꿈꾸었던 인간인지, 어떻게 이렇게 흘러와 살고 있는지, 내 팔자야 하고 외친다. 가슴의 슬픔은 실체를 잃어버리고 정서만 남아 내가 된다. 

어쩌다 멀어져 갔나.


애달픈 꿈이지요.

늘 애달픈 것이 있게 마련이지요. 이걸 하면 하지 못했던, 애쓰지 못했던 그것이 남아 아쉬움의 방을 짓지요. 삶은 현실 앞에 선 나를 냉정하게 만들어요. 선택하고 집중하고, 살아야 하니까 살고 봐야 하니까, 현실을 보듬고 위안을 삼지요. 꿈 따위야 멀고 먼 비현실이지요. 냉정한 현실이에요.


그러면 끝난 건가요. 봄비 속 연기처럼 올라오는,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여겼는데, 스멀스멀 출처를 모르게 올라오는 젖은 연기, 그것이 나를 괴롭히지요. 허전하고 아픈, 물에 젖은 연기가 세상의 변두리에서 올라오고 있죠. 세상은 슬프고도 아름다움이어서 내 심연은 애가 닳지요.

이 애달픔 하나 지니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 봐요. 대부분 이런 애달픈 꿈이 있어요. 균형 잡힌 행복감을 다 주지는 않는 거죠 자연은. 어쩌면 그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이란 끈을 놓지 않는지도 몰라요. 살고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죠. 나는 그때 이랬는데, 이러고 싶었는데, 이런 거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살고 봐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꿈이에요. 그리고 홀로 애달프게 떠 있는 나의 꿈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나를 밀고 가는 거죠. 그 애달픈 꿈이 현실이 되려면 우리같이 보통 사람들은 현실을 부지런히 살아야 보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그 기운으로 똘똘 뭉친, 그 힘의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선 특별하죠. 편중된 기운이기도 하고요. 보통 재물과 명예와 자기실현, 인간적인 행복을 두루 다 갖추고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느 하나를 얻는 대신 다른 것은 얻기 힘들게 되어 있어요. 타고난 그 기운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이것은 행복일까요, 불행일까요. 그래도 애달프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인생의 기운은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내 기운을 잘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어떤 사람들은 재물이 꿈이고, 어떤 사람들은 권력이나 명예가 꿈이고, 또 어떤 이는 예술적인, 자기실현적인 것이 꿈인 것처럼 각기 다른 기운의 작용이라고 봐요. 이 모든 것에 편중됨이 없다면 균형 잡힌 행복감을 누리며 사는 거죠.


살다가 알게 되는 나 자신의 마음이 있잖아요, 그것은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이 당시당시의 꿈이에요.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뭐가 보이는 거죠. 밥벌이가 급선무인데도 예술하겠다고 오로지 매진하는 사람은 그의 기운이 예술적으로 아주 강한 것이어서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는 거죠. 다른 건 너무 시시한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우리같이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갈등하죠. 그러나 알 수 없는 꿈이 현실이 되려면 현실을 살아야 꿈이 보여요. 이게 보통 사람들의 팔자요, 조화라고 생각해요. 인내해야 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죠. 그래서 인생에 대한 '개똥철학'도 생기고, 깨달음의 한마디들을 각기 지니게 되는 것 아닌가요.

난 이것을 사랑해요. 

그리고 이제 이 애달픈 꿈을 용기 내서 끌고 나와, 현실에서 살도록 해야 할 차례예요.


그러면 이 애달픈 꿈을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다음 영화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꽃피는 봄이 오면>. 최민식 주연. 2004년 개봉.


교향악단 연주자를 꿈꾸었던 트럼펫 연주자 주인공이 가난과 실패의 좌절 끝에 찾아간 강원도 탄광지역 도계중학교에서 관악부 지도 교사가 되어, 암울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과 꿈도 희망도 막장일 것 같은 탄광촌에서 사람살이의 따뜻함과 연주를 꿈꾸는 아이들의 꿈을 마주하고, 연주를 하고 싶었던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연주자로서 다시 처음이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다.

꿈과 현실의 벽은 언제나 불협화음이라 괴롭기만 하던 주인공은 그곳에서 삶의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꿈이란 현실을 떠날 수 없고, 지금까지 자신은 얼마나 현실과 괴리된 상태에 있었는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자신이 유명해지고 싶은 데에 맞춰져 있었는지 알게 된다. 연주의 진정성은 현실에서 연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명성을 탐하던 주인공은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트럼펫 파트 연주 선생이 되기로 한다.


이 영화에서 느낀 정서적 연대감은 나한테 큰 힘이 되었어요.

현실과 꿈의 갈등 속에서 현실을 끌어안는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덤이라 하기엔 너무 울림이 큰 <다시 처음이라오> 노래가 그랬어요. 

애달파하고 외로웠던 아련한 꿈의 현실이 있다면 어떻게 현실에서 이루고 살 것인가를 돌아보게 해요.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헛됨은 욕심에서 오니까요.


암튼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연주로 더 행복해질 사람들을 꿈꾸는 주인공의 마지막 미소가 더없이 아름답고 편안했어요. 벚꽃 잎 흩날리는 낡은 아파트 앞의 봄이 눈에 선하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봄이 오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