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아나무 May 20. 2024

40대, 너의 힘듦을 안다

굽은 길을 기다리며 인생의 술 한잔 

소백산을 오른다. 곧은 오르막길이 힘들어 거의 땅만 보고 걷는다. 허리에 뒷짐 지고 헉헉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저만치에 굽어도는 길이 보인다. 안도감이 생긴다. 잠시 걸음을 멈출 곳을 찾으니 다시 힘을 내게 되고, 숨 가쁜 것도 참을 만하다. 

굽은 길에 이르러 비로소 길 안쪽이 품고 있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큰 나무들 아래 철쭉과 황국덤불 등이 어우러져 얕은 바람을 맞고 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나면 무겁던 머리도, 다리도 상쾌해진다. 이제는 오르막길이라도 곳곳이 굽은 길이라 본격적으로 여유 있는 산책이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길을 가다가 굽은 길을 만나는 것이. 지루하지 않게, 여유롭게, 쉴 수 있게 잡아준다.


곧게 난 길을 좋아하던 때도 있었다.

멀리까지 시원하게 펼쳐진 길을 보면 마치 내 인생이 저 탄탄대로처럼 열릴 것 같았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옆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내 가던 길을 올곧게 가기만 하면 잘 사는 것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한 용기가 솟아오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20대, 30대가 아니었나 싶다. 삶의 단어에 '우리 이거 해보자'며 희망하는 것들로 가득 차던 그때에는 희망하는 것이 곧 실천이 되고, 추진하는 과정이 의미로 남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삶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사전의 일러두기쯤에 있었을까.

그때 보는 세상은 직진 세상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 같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고 아는 척하며, 선한 마음으로 곧게 살아간다면 얼마의 시련이야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정한 것들에 굴하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당당하게 힘차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빛나는 아름다움이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어리니 좋은 부모로 인생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은 많은 걸 참고 견디게 했다. 아이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문화유적지를 찾아 여행을 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유로 큰집 식구들과 시누이 식구들이 때때로 와서 며칠을 뒹굴어도 좋다 좋다 하며 화목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화평하게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커가고, 어른과 같이 살면서 직장 생활을 하면 비움이라든지 버림이라든지 이런 간소함을 누리기는 힘들다. 갑갑하지만 하던 대로 살게 된다. 오히려 생활의 변화가 두려워지기도 한다. 

우물도 퍼내야 새로 물이 차오르 듯 세월의 두께가 쌓이면 비워지는 것이 있어야 생기가 돈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변화를 줘야 하는데, 그것이 두려워지는 때가 되면 지금 이대로에서 무엇이든 탈없이 잘 됐으면 하고 바란다. 그 시기가 나의 경우 40대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40대.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어느덧 나이 40대 중반을 넘어선다. 나는 직장 생활 20년 가까이 되어도 안정은커녕, 의무와 책임이 많아지고, 생활은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수업시수가 정말 많았다. 첫 학교 이후 줄곧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했던 터라 보충수업과 야간자습 지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몸이 녹초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거나 자려고 했다. 깨어 있어도 다정하게 말 붙일 기운이 없어 입이 떨어지질 않았는데, 그날이 지나고 나면 또 엄마로서의 자책감에 시달렸다.

IMF 2년 뒤에 남편은 모아 둔 자금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자금을 끌어오는 건 직장인인 내 몫이었다. 그 암흑의 시기에 사업을 시작하였으니 남편인들 오죽 힘들었을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잘해보자고 서로 용기를 주며 몇 년을 버티었다. 그러나 원금은커녕 이자 내고 생활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흔한 문화생활조차 하지 않고 자린고비 하며 산 세월이었다. 

아이들 옷을 얻어 입히면서도 기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있으면 다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몇 년은 버티면 달아나고 기대하면 악재가 나타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두운 터널 속에 우리를 가두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걸어가도 터널 속에 있는 우리 모습이 너무 힘이 들어, 애쓰는 남편 몰래 많이도 울었다. 

외롭고 고단한 시기였다. 

인생에 이처럼 술을 부르는 때가 있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책임감과 자책감과 궁핍. 살림은 찌들어도 우리 집에 올 사람들은 와서 북적였고, 노모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 자식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는 자책감, 하늘로 가신 엄마, 공사대금에 시달리는 남편, 집안일과 학교일 등 여기서도 저기서도 삶은 갈등이고 미로며 부끄러움이었다. 누가 인생이 뭔지 말해주면, 답을 던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늘만 쳐다봤다. 공자도 모른다는 이 '삶'이란 것이 참으로 무겁고 버거웠다. 책을 읽고 귀담아들어도 현실은 현실이었고, 절에 가서 삼천배를 몇 번 해도 집으로 오면 며칠 가지 못했다. 당당하게 살고 싶었던 한 인간의 일기장에는 온통 미로 속을 헤매는 이 두려움과 갑갑함으로 검게 얼룩졌다.

나이 40대는 불혹이라 한 말이 거짓말 같았다. '미혹되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바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만큼 살아왔으니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 너의 믿음에 의혹을 가지지 마라' 하는.

40대가 되어 이렇게 힘든데, 성인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했는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공자의 시대도 아니고 온갖 삶의 군상들이 섞여 사는 시대인데, 시대를 다 통섭하여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성인의 말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불혹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는, 역설적이게도 30년을 살아본 40대가 삶에 대해 가장 많은 의문과 고통을 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은 나만 가장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옆을 돌아봐도 40대는 힘들게 살아낼 수밖에 없는 시기이고, 견뎌내야 하는 몸의 허리였다. 그래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는 나이인가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주팔자를 보러 동료를 따라갔다.

책을 보고 풀이를 해주는 할머니였는데, 같이 간 동료가 먼저 보고 나가자,

"에고, 저 양반 아들, 내년에 합격 어렵겠는데. 재수해야 되는데, 그 말 참 못하겠네." 했다.

내 사주와 남편 사주를 넣었다. 언제쯤 형편이 좋아질 것 같냐 하니,

"에구, 우짜면 좋노. 지금 죽으라고 힘드네. 너무 힘이 드네. 앞으로 4,5년은 더 가야 좀 낫겠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퍽 났다. 목이 메어 더 묻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힘 내래이. 지나가면 좋아진대이."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왔는데, 2,3년도 아니고, 4,5년이라니, 어쩌라고. 어떻게 더 기다리라고.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고 가슴에 돌덩이가 매달리는 것 같았다.

복채를 드리니 할머니가 돈을 안 받겠다고 하셨다. 

"니가 이리 힘든데 내가 우째 그 돈을 받노. 괜찮다. 그냥 가라. 나중에 형편 풀려서 생각나면 주든지."

워낙 완강하게 안 받으시려고 해서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그래도 그럴 순 없다며 만 원만이라도 받아달라고 사정해서 드리고 나왔다.

사주 할머니의 말씀대로 5년은 넘어서 경제적으로 좀 나아졌다. 남편이 사업을 접었기 때문이었다. 


50대가 되어도 여전히 은행빚을 안고 살면서 넉넉해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동정심과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가난하게 출발해서 사업도 해보고 열심히 살았으니까 후회는 없었다. 더 이상 어쩌겠나. 아이들 공부나 잘 마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그 뒤 남편은 고물상을 열었다. 버려질 것들을 모아다가 자원 재활용을 하는 것이니 나름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고, 그전에 이미 고물상 해서 돈 번 사람들이 있다 하기에 나는 남편의 말에 설득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엔 힘이 들어도 새로운 일에 아주 신바람이 났지만 2014년 IMF보다 더 하다는 경제위기가 닥치자 고물값은 점점 하락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너무 힘든 상황이 몇 년이나 계속되다 보니 남편은 건강에 신경도 못쓰고 병을 얻었다. 이제 사업을 정리하고 애쓰던 마음을 다 내려놓고 노후에 나무 심으며 살자 했는데, 그런 마음을 먹고 나니 남편은 노을 너머로 가버리고 말았다. 사별의 고통은 극심했다. 그리고 고물상 정리는 다 내 몫이 되어 나는 다시 새로운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40대와 50대의 고통은 서로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남편을 잃고 뒷일을 마무리하던 그때보다 더 힘들었던 시기가 아이들이 어리던 40대였던 것 같다. 30대 때 나는, 나이 40대가 되면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크기를 알 수 없는 40대의 돌길을 살면서, 인생을 동해대로, 서해대로처럼 곧게 펼쳐지길 바랐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기대가 무참히 깨졌으니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인생을 기대로 가득 채우던, 아무것도 모르는 오만한 시절이었다.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인생은 알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살아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제야 나는 굽은 위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낀다.


나는 소백산 비로봉을 목적지로 정하지 않는다. 또 길모롱이에 서서 이 길 앞을 미리 상상하지도, 예정하지도 않는다. 굽이도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바람과 빛이 스며든 나무들의 공간에 잠깐의 그림이 되어 보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내려온다. 굽은 길이 참으로 넉넉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갈 일도 없지만 만약 다시 그런 시절이 온다면, 살아본 나는 어떻게 살게 될까. 여전히 답을 할 수 없다. 더 낫지도 않을 것 같다. 다만 너무 애쓰지 않고 꿈꾸지 않으리라.


세상을 가장 영민하게 살아낼 힘든 40대를 위해 '술 한잔' 사 주고 싶다. 

내 인생에게 아무리 술을 사 줘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는다. 내가 사 준 술만큼 나의 잔에 겸손과 무심한 자세를 채워 줄 뿐이니, 천천히 주거니 받거니 마시면 될 것 같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정호승, 술 한잔


살아내고 가면 굽은 길 위에 앉아, 지나온 거친 길 위의 나에게 술 한 잔 사주며 인생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백리향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