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상담실에 들어갔다. 밖의 대기실에서 마음 진정시키라는 듯 틀어놓은 클래식을 들으며 기다리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져 노트장을 켰다.
오늘은 첫 상담이다. 우리 엄마의 첫 상담.
상담을 처음 권유한 것은 작년이었다. 우울증을 앓던 내가 먼저 상담실을 방문하고 고심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엄마도 상담받아볼래? 권유한 데에는 딱 한 가지의 명쾌한 이유만 있지 않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아픈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나만 이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 다 미루고 미루다 학교 과제를 핑계 삼아 엄마의 손을 잡았다. 내가 엄마를 찍을 거야. 다큐멘터리 수업에서 흥미로운 대상을 찾으랬는데, 그게 엄마야. 나는 우리 엄마가 제일 흥미로워. 그리고 나는 이 다큐멘터리 과제를 계기로 우리 가족의 상담을 시작할 생각이야. 처음에 그녀는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당신은 찍을 거리가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계속 우는 소리 하면 우리 엄마는 나를 위해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과제 때문이라니까 뭐.
하지만 엄마는 모르겠지. 나는 순위를 정해두었다. 1순위. 촬영. 0순위. 상담. 촬영이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상담하겠다는 의지는 꼭 지켜내고야 말 것이라고.
오늘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익숙한 역 근처에 내려 거닐었다. 하지만 상담소는 우리가 원래 가던 익숙한 공간에 있지 않았다. 구석진 골목이 이르자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상한 것 같아... 여기 좀 그래.” 엄마의 방어 기제였다. 경계를 빙자한 두려움. 겁부터 먹는 우리 엄마는 늘 경계와 불신을 핑계 삼아 하기 싫다는 티를 그렇게 냈다. 처음은 늘 그렇다. 설레고, 기대되면서도 하염없이 두렵다. 아무래도 기대보다는 무서움의 비중이 더 클 것이다. 아마 상담의 당사자인 엄마는 나보다 더 그렇겠지. 작년 혼자 상담소 가는 길이 이랬다. 곁에 아무도 없이 낯선 골목 둘러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을 응시하며 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의 입구처럼 생겼다 생각했다. 그런데 온갖 잡생각과 걱정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건 쉬웠다. 그저 발을 뻗고,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면 되는 셈이다. 그러면 짠! 하고 도착해 있는다. 괜히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의심이 막 되는구나. “ 이 말을 기다려왔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길래 내가 먼저 문을 열었다. 때로는 타인의 용기가 힘이 될 때도 있다. 나를 따라와 주었듯 이렇게 또 믿어주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시간이 넘으면 돈을 더 내야 한다고 알람까지 맞춘 우리 엄마는 구석진 방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방음이 완전히 되지는 않는지 뭉개진 언어가 웅웅 진동이 되어 다가온다. 엄마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또 자식들 얘기를 늘어놓을까.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미약한 반항을 하려나. 구겨진 얼굴을 하고 나올까, 숙제를 해치운 얼굴을 하고 나올까. 후련한 얼굴일까, 찝찝한 얼굴일까. 아무렴 어때. 뭐든 일단 하는 게 좋다. 그 경험이 유쾌하지 않더라도 뭐든 일단 하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체되었고, 수년 동안 고여 있었다. 흐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도라도 달갑다. 이것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와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각오로 시작한 상담 계획이었다.
이제 고작 졸졸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나는 그저. 엄마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내 원대하고 이기적인 꿈은, 엄마가 괜찮아지는 것이다. 엄마가 엄마를 위해 살았으면 한다. 엄마가 자식들보다 스스로를 더 중요시 여겼으면 한다. 그래서 또박또박 아픈 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화나면 화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