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었던 길에서
고남리에 비가 내리면 그 모습이 참 운치가 있다. 마당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마치 꿈속에 있는 듯 고요한 마음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은 마당가에 있는 미나리를 뜯어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침개를 한 장 부쳤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글지글 끓으면 반죽을 한 국자 넣고 얇게 펼쳐서 접시에 담아주면 남편은 막걸리를 가지고 와서 처마밑에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며 망중한을 즐긴다. 주말이 주는 여유다.
비가 내리는 저수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이 춤을 추듯 앞 다투어 튕겨 오르고 있다. 우산을 쓰고 비 내리는 저수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걸어서 내려간다. 집 뒤편 수로도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차게 내려와 제법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집 안까지 들린다. 처마밑에 앉아 있다가 한기가 들면 집 안으로 들어와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넣고 앉아 있으면 금세 훈훈한 공기가 거실을 감싼다.
비가 그치고 나면 우산을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가본다. 고남리 들판에 뿌옇게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라 경치가 그만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비 온 후의 깨끗한 느낌을 느낀다. 동네 앞으로 가는 길에 대나무 밭이 있다. 비가 온 후라 죽순이 몇 개 보였다. 주구네 것인지 모르니 함부로 딸 수가 없다. 잠시 망설이다 앞 집 언니에게 물으니 주인이 없으니 따도 된단다.
바구니를 들고 대나무 밭에 갔더니 제법 굵직한 죽순이 뾰족이 올라와있다. 겉에 보랏빛을 띠고 있는 것을 골라 손으로 살짝 밀었더니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손에 힘을 주어 힘껏 밀었다. 넘어지면서 나는 소리도 경쾌하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몇 개 따 가지고 마당에 앉아 부엌칼을 들고 세로로 그으니 껍질이 분리되며 죽순의 뽀얀 속살이 부드럽다.
솥에 물을 끓이고 다듬은 죽순을 넣고 굵은소금을 한 줌 넣어 살짝 데쳤다. 말랑말랑 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찬물에 담가 먹기 좋게 갈라놓으니 제법 많다. 어릴 적 엄마도 죽순이 날 때는 대나무밭에 가서 우리가 따오면 죽순을 데쳐서 맛있게 무쳐주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의 레시피를 상기하며 양념을 만들어본다.
잘게 찢은 죽순에 고추장, 고춧가루, 식초, 설탕, 다진 마늘, 매실액을 넣고 참기름, 참깨 넣고 조물조물 버무렸다. 빨간 양념을 입은 죽순의 식감은 약간 닭고기의 가슴살을 먹는 것처럼 쫄깃한 맛이 느껴졌다. 남편과 함께 저녁밥상에 미나리무침, 죽순무침, 냉이된장국을 놓고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아삭아삭 쫄깃한 죽순의 맛이 환상이다.
딱 그 철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더 소중한 생각이 든다. 자라는 죽순은 하루아침에 키가 한 자나 자라 있을 때도 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귀한 식재료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우후죽순'이란 말이 나왔을까? 또 하나의 새로운 추억이 생겨서 참 좋다. 일 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비 오는 날이 또 기다려진다. 그렇게 고남리집에서의 추억이 또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