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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Aug 26. 2021

◇5. 서른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회사생활을 통해 깨달은 아버지에 대한 착각과 오해

힘든 취준을 뚫고 취업에 성공하여 영광스럽게 회사를 다닐 줄 알았던 나는 어느새 불평이 가득한 입사 3년 차가 되었다.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자주 드는 생각은 "도대체 회사생활을 어떻게 30년 넘게 하지?"였다. 이렇게 따분하고 재미없는 회사에서 나의 인생의 가장 큰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 운명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취준 시절에는 취업만 하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하고 보니 버티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회사생활이 따분해질 때쯤 주변 선배들한테 회사생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다들 그냥 하루살이처럼 살아보면 시간이 간다고 했고, 나도 어느새 새내기 하루살이가 되어갔다. 이제는 이 세상 회사원들 모두가 존경스러워졌다. 출근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벅스를 들고 버스를 타는 분이나,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뛰어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 모두가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5년 전까지 한 회사에서 30년을 근무하셨다. 아버지의 입을 빌러 말하자면 본인은 승진도 탄탄대로였고, 요직에서 명예로운 퇴직을 한 거라고 하였다. 회사생활 전에는 항상 아버지가 하는 허세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세상 아버지는 누구나 그런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좋은 회사 입사하였지만,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했다고 항상 아쉬워하였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고생도 덜하고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막상 내가 회사라는 곳에 일환이 되어보니, 이는 큰 착각이었다. 내가 출근하면서 봤던 존경스러운 직장인의 모습들이 아버지의 이십 대부터 오십 대부터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긴 하지만 어딜 가든 당당하게 "다정한 아빠"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가정적이었다. 오빠와 나의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학창 시절 내내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주말을 내주었고, 우리는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가족들이랑 매주 여행 가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였다. 주말을 가족이랑 보내는 건 공식 같은 거였고, 이는 지금 주말에 하루는 가족이랑 보내는 나를 만들었다. 이런 내가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한 건 성인이 된 이후였다. 나처럼 여행을 많이 간 가족도 드물었고, 나처럼 가족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경우고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의 첫인상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난다는 것이었다. 난 몰랐지만, 난 사랑을 많이 받고 행복하게 자란 아이였고, 부모님의 노력이 이런 나를 만든 것이었다. 


부모님의 노력에는 아버지의 희생도 포함되어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푹 자지 못하는 것도, 주말에 쉬지 못하는 것도 너무 적응되지 않고 힘들었다. 아버지는 일이 많아서 항상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하였지만 주말은 항상 오빠와 나를 위해 할애하였다. 전국 어디든 아버지 차를 타고 가서 아버지는 텐트를 설치하거나 짐을 들고 있는 게 대다수였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였다. 내가 바다를 무서워할 때는 아버지가 손수 튜브를 밀어주면서 무섭지 않게 해 주었고, 벌레들이 많은 계곡을 가면 밤새 벌레를 퇴치해주었다. 아버지가 운전할 때는 난 항상 잤지만, 아버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왕복 8시간을 운전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들 중 단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좋지 못한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입사시험을 1등으로 합격해 입사한 케이스라고 하였다. 그렇게 대기업이 입사한 아버지는 남들보다 좋지 않은 스펙으로 이사직을 달고 퇴직하셨다. 30년 정도 일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것 역시 착각이었다. 아버지는 정년까지 근무하고 퇴직하셨는데 이렇게 근무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사기업이다 보니 강제퇴사를 시키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여 꾸준히 인정받았던 것이다. 퇴직 후에도 아버지의 공을 인정받아 여러 기업에서 아버지를 스카우트하여 지금까지 쉬지 않고 근무하고 계신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술도 많이 마시고 집에 늦게 오는 일이 잦으셨다. 항상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변명이 아닐 수도 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원하지 않은 회식자리에 끌려가서 본인의 입지를 다지는 일이 많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시대에서는 술자리의 의미가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항상 술냄새 풍기며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방문을 걸어 잠그면서 상대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나는 아버지를 향한 착각과 오해들을 거둘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열렬히 일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 가정에도 소홀하지 않으셨고, 어린 시절 우리에게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어주셨다. 아버지는 본인의 휴식보다 자녀들의 웃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고, 가족과의 행복한 일상을 위해 잠을 줄이면서 일을 하셨다. 


서른을 바라보며 깨달은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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