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과제를 놓쳤다고 하면 정리해둔 자료를 보내주고, 단톡방에서 조용한 애가 있으면 따로 연락해 안부를 물었다. 다 같이 어울릴 땐 빠진 사람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고, 수업이 끝나고 눈치 보는 친구가 있으면 "집에 가? 같이 놀자"라고 먼저 불러 세웠다. 누군가 뒤처질까봐, 혼자 남을까봐 신경 쓰는 건 그냥 내 성격인 줄 알았다.
실망은 한순간에 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자주, 그리고 익숙하게 다가왔다. 단체 과제를 하면 처음엔 다들 열심인 척 하다가도 막상 진행할 땐 하나둘씩 슬쩍 빠졌다. 자료는 내가 찾고, 발표 자료도 내가 만들고, 조율도 내가 했다. 발표가 끝나면 “수고했어”보단 “드디어 끝났다”는 말만 돌아왔다.
책임질 사람이 필요할 땐 다들 안 본 눈했고, 내가 조용히 일을 떠안고 있으면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마음을 숨기기 시작했다. 서운함은 삼키고, 기대는 지우고, 괜찮은 척하는 법을 익혔다. 스스로를 밀어붙였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덜 다칠 거라 믿었고,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야 덜 다칠 거라 믿었다.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와 술 자리가 있던 날이었다.
내가 툭 내뱉었다.
“오늘 발표 준비 진짜 나 혼자 다 한 거 같지 않냐.”
친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없이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거 같아.. 네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할 거 뻔히 아니까, 그냥 너가 한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뭐, 익숙하지. 늘 그런 식이니까.”
친구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
나는 당연하다는듯 말했다.
“그야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니까. 내가 나서서 한거지. 그게 왜?”
친구가 이어 말했다.
“너한테 뭐라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나도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땐 그냥 내가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하는줄 알았거든.”
친구가 잠시 웃었다.
“근데 나중에 알았어. 사실은… 다른 사람들 나한테 ‘와 쟤 진짜 착하다’, 그렇게 봐줬으면 해서 그랬던 거더라. 정작 내 마음은 엉망인데, 남에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맥주가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너도 혹시... 그런 거 아닐까해서.. 누굴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싶어서.”
그 말이, 아무도 몰랐던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나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는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군가 “너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주길 바라며 내가 먼저 연락했고, 먼저 챙겼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으니까.
괜히 조용한 친구한테 말을 걸고, 빠진 사람 없는지 살피고, 누군가의 감정을 먼저 알아차리는 척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다 거절이라도 당하면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저릿했다. 그게 쌓일수록 마음을 감췄고, 괜찮은 척하는 법만 늘어갔다. 진짜 괜찮아지는 건 그런 척을 반복한 끝에 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속에서 “너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거다.
그걸 얻으려고 친절했고, 이해했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이제는 순서를 바꾸고 싶다. 누가 나를 인정해줘서 괜찮은 내가 아니라, 나 스스로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내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나를 먼저 챙기고, 다독이고,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을 편하게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나는 누군가가 채워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채워가는 중이다.
그런 마음이 충분히 차오르면, 흘러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