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다는 게 뭘까?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게 있을까?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말들을 하곤 한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첫눈에 반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치 영화처럼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는 듯한 이야기들. 정말 그런 게 가능할까?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모든 일은 선택과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신중했다. 어떤 만남이든, 어떤 사건이든 그것은 운명이 아닌, 내가 내린 결정과 책임의 결과라고 믿었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 인생을 바꿔보려 했던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생각의 반환점을 도는 일이 일어났다.
제주도로 떠난 건 단순한 충동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가방을 챙기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래 가려던 카페가 문을 닫아버려 그냥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갔다. 안은 따뜻했고, 창밖으로 흐르는 빗소리가 유난히 차분하게 들렸다. 쉐어 테이블에서 커피를 주문하려던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자리 혼자 쓰시나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으세요."
그녀는 감사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 내 책을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
"이 책 어때요?"
나는 책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져요. 그냥 지나칠 법한 일상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우리는 늘 뭔가를 기다리지만, 막상 그 순간이 와도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덧붙였다.
"처음엔 그냥 흔한 말 같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예를 들어, 다들 더 나은 기회나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정작 그게 와도 ‘이게 그거였나?’ 하면서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많다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 행복해야지’ 하고 기다리다 보면, 막상 좋은 순간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버릴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다 보면 결국 늘 뭔가를 기다리는 상태로만 사는 거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래요. 항상 나중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아요. 거창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닌데, 읽다 보면 은근히 찔려요."
그녀도 피식 웃었다.
"그럼 저도 읽으면 찔릴까요?"
"아마도요."
우리는 둘 다 웃었다.
"혼자 여행 오셨다고 했죠?"
그녀가 물었다.
"네. 그냥 좀 머리도 식힐 겸. 가끔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보고 싶을 때 있잖아요."
"맞아요. 저도 그래서 왔어요. 혼자 여행하면 가끔 예상 못 한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행의 묘미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뭔가 새로운 걸 보게 되는 느낌이랄까."
"맞아요. 그리고 혼자 있으면 별거 아닌 일도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길을 잃는다든가, 우연히 좋은 카페를 발견한다든가."
"길 잃은 얘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 예전에 오사카 갔다가 완전 반대 방향으로 가서 한참 헤맸거든요. 근데 그러다가 엄청 분위기 좋은 골목길을 발견했어요. 원래 가려던 데보다 더 좋았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때 있죠. 나중에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된 일 같기도 하고."
"그쵸. 그러니까 뭐든 너무 계획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여행뿐만 아니라, 그냥 삶도 그런 거 아닐까요? 다들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예상 못 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더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도, 제가 비 때문에 급하게 들어온 덕분이네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요?"
"원래 가려던 카페가 문을 닫아서 그냥 걸어가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여기로 들어왔어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 비 덕분이네요?"
그녀도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재밌네요."
특별할 것 하나 없었지만, 특별했던 순간이었다.
그녀와 잘 되지는 않았다.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다시 만날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히 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운명 같은 순간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는 별 의미 없는 만남이라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스치는 사람처럼, 그날의 대화도 일상의 수많은 대화 중 하나일 거라고. 잠깐의 우연이었을 뿐, 다시 떠올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도 그날이 떠올랐다. 다시 마주칠 일 없는 사람과 우연히 나눈 대화가 자꾸만 기억에 남았다.
가끔은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낸 일들이, 지나고 나서야 특별해지기도 한다.
비 오는 제주도의 어느 오후, 우연히 마주한 대화.
그건 운명이었을까?
운명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