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자태 아래 피멍 든 발짓

by 다감

「백조 인간」 : 물 위에선 우아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을 차는 사람.


이 사람들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보입니다.

회의가 있으면 늘 완벽히 준비하고, 메일 답장도 빈틈 없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도 허둥대지 않고 “그건 이렇게 하면 돼요.” 하고 바로 정리해 줍니다. 감정 기복도 없습니다. 짜증날 만한 상황에서도 “괜찮아, 별일 아니야.” 하고 웃어넘깁니다. 소위 말해서 일도 잘하고 인간 관계도 잘하는 사기캐.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해?”

“원래부터 잘했겠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냥 타고난 거야.”

하지만 그 완벽함‘운’이나 ‘타고난 재능’으로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수없이 계획하고, 망치고, 다시 세운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만든 결과였죠. 물 위에선 우아한 백조처럼 보여도, 물 밑에선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을 젓고 있는 사람.

저는 이런 사람을 ‘백조 인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1. 정의

ㆍ백조 인간

1) 겉으로는 늘 여유롭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런 모습 뒤엔 수많은 노력과 발버둥이 숨어 있는 사람.

2) “나는 잘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해”라는 틀을 가지고 있으며, 수치심을 ‘노력의 연료’로 바꾸는 사람.



2. 페르소나

지안 / 26세 / 의대생 / ENTJ / 취미: 자격증 따기


Scene #1 — “나 그냥 잤어.”


시험 당일 아침, 교실은 이미 전쟁터였다.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 펜 딸깍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다들 노트를 펼쳐 마지막 단어 하나까지 머리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야, 공부 많이 했어?” 누군가 물었다.

지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잤어. 어제 책도 안 봤어.”

순간 몇 명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와, 진짜? 멘탈 대박이다.”

놀란 얼굴과 감탄이 뒤섞였다.

누군가는 ‘쟨 원래 타고난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시험이 시작되고, 종이 울렸다.

펜 굴러가는 소리만 남은 교실에서 지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문제를 풀었다.

답을 적는 손이 빠른 것도, 급한 기색이 없는 것도 왠지 더 대단해 보였다.

결과가 나왔다. 지안은 또 상위권이었다.

책을 덮던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한숨을 쉬었다.

“세상 불공평하다. 쟨 공부도 안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나와?”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다. 괜히 집에만 있기 싫어 일찍 학교로 향했다.

아직 교실 불이 다 켜지기도 전, 복도 끝에서 은은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 지안이 먼저 와 있었다.

어제 시험지를 펴놓고 연필을 굴리며 오답 노트를 쓰고 있었다.

하얀 여백 위에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지워낸 흔적 위에 다시 풀어 쓴 답이 덧칠돼 있었다.

옆에는 이미 다 쓴 지우개 가루가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한참을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만 봤다.

그제야 알았다.

물 위에선 우아해 보여도,

물밑에선 얼마나 치열하게 발을 젓고 있었는지.

남들이 모른다고, 그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Scene #2 — “그거 그냥 내가 다시 할게.”


조별 과제 발표를 앞두고 도서관 세미나실에 모였다.

각자 맡은 파트를 합치는 날이라 다섯 명이 둥글게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민지가 맡은 자료를 열자, 화면에 빈칸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래프 자리엔 ‘추가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고, 설명은 두세 줄뿐이었다.

민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미안해. 다른 과제랑 겹쳐서 아직 다 못 했어.”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때 지안이 말했다.

“그거 그냥 내가 다시 할게.”

잠시 정적이 흐르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그래, 지안이 해주면 든든하지.” 하고 웃었다.

분위기는 어찌저찌 다시 풀렸고, 과제는 이어졌다.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 지안이 내 옆에 와 조용히 불렀다.

“야, 잠깐만.”

나는 가방을 멘 채로 돌아봤다. 지안이 주위를 한번 훑고,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내가 '그거 그냥 내가 다시 할게’라고 했잖아.”

“응.”

“혹시 내가 너무 차갑게 말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효율적으로 하자고 한 거잖아.”

지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혹시 민지 기분 나빴을까 봐.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해서 다시 한다고 한거구나’ 그렇게 느낄 수도 있잖아.”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애들한테는 내가 이런거 물어봤다고 하지 말아줘. 괜히 내가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인거 아는 거 싫어.”

겉으론 인간관계도 완벽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에 생긴 작은 흠집까지 곱씹는 사람이었다.



3. 백조 인간은 이런 사람입니다.

백조 인간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해 보이고 싶어서 발을 더 세게 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실제로도 잘하고,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쟨 참 대단하다.”, “원래 잘하는 애야.”

이런 말이 듣고 싶어서, 아니, 이런 말이 멈추는 게 두려워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더 치열하게 준비합니다. 그 채찍질은 분명 그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게으름을 모르게 하고, 새로운 도전을 밀어붙이게 하고,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곳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 발버둥이 너무 오래 이어지면 결국 숨이 차오릅니다.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괜찮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멍에가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백조 인간에게 필요한 건 ‘조금은 미끄러져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해 주는 마음입니다. 하루쯤은 공부하지 않아도, 일을 덜 해도 괜찮습니다. ‘성과’나 ‘이미지’ 대신 ‘지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묻고, 그 대답을 위해 잠시 멈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당신은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