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헐.... 대박....."
보라의 턱이 배꼽까지 내려왔다.
"오빠 어때요?? 뭐가 막 그려지지 않아요???"
원희에게 대답을 넘기고 싶어서 원희를 봤다.
"조교 쌤이랑 먼저 이야기해보고, 학회(학과 회의) 열어서 다른 애들 의견도 알아봐. 그게 먼저 인 것 같다."
이것이 원희를 중재 위원을 시킨 이유다.
"그래. 그럼 보라는 최대한 빨리 학회 날짜 잡고, 예리랑 희경이는 보라한테 날짜 받으면 파트 학년 대표들한테 문자 싹 날리고. 나는 내일 바로 조교 쌤이랑 학과장님한테 의견 물어볼게."
“내일 토요일. 오빠.”
역시 보라다.
“월요일에 물어볼게”
그녀가 보였다.
"어.. 그.. 상아.. 는. 우선 60명 기준 교통비 좀 알아 봐줘요. 버스도 좋고 기차도 좋고. 숙박도 같이 알아 봐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날짜는... 우선 대략 5월로 잡아 줘요. 자세히는 의미 없으니까 대략적으로만.
우리는 마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착착착 움직였다.
토요일 아침.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탄다. 집에 가서 오랜만에 엄마 얼굴도 보고 천천히 책을 읽을 생각이다.
한참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원희에게 전화가 온다.
“어. 왜”
“어댜?”
“나 엄마집 가. 넌?”
“나도”
“어디 엄마?”
“노원 엄마. 엄마가 오래, 너 온다고. 와서 밥 먹으래. 제창이 형도 불렀데 “
노원 엄마는 우리 아니, 내 엄마다. 원희랑 제창이 형은 내 엄마한테 아들이나 다름없다. 엄마는 나한테 얘기 안 하고 원희랑 제창이 형한테 꼭 직접 얘기한다.
왜 그러냐 물어보면 심심해서 그런다 한다.
엄마는 혼자 있다. 아빠는 나 군대 있을 때.. 돌아가셨다. 갑자기. 한없이 건강해 보였던 우리 아빠는 간경화가 있는지 본인도 몰랐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군복을 입고 장례식장을 가서 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날, 나와 같은 군복을 입은 원희와 제창이 형이 왔다. 그들의 말로는 군 생활 한 달을 더 하더라도 나에게 가야 한다고 대대장님까지 한테 가서 사정을 했다고 한다. 원희는 3일 동안 아무 말도 안 했으며, 제창이 형은 '엄마 챙겨 병쉰아'라는 말만 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원희랑 제창이 형을 아들로 삼았다.
엄마는 미술용품을 파는 가게, 화방을 운영한다. 다행히 근처에 대학이 있어 나름 장사가 잘 되는 거 같다.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재료 살 돈이 없어 미술을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그 일을 시작하셨다 한다. 그 덕분에 나는 재료 걱정 없이 미술을 할 수 있었다. 아빠는 운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는 그런 고속버스 기사였다. 아빠가 큰 버스를 모는 것을 볼 때면 작은 사람 한 명이 큰 티라노사우르스를 조련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분명 엄마 때문에 미술을 했고, 아빠 때문에 운전병을 간 것일 거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도 군대를 전역했다. 복학을 앞둔 시점 엄마는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아들. 나가서 혼자 살아. 아들이 엄마랑 있으면 아들한테만 기댈 거 같아. 너도 이제 어른인데.. 혼자 사는 거 연습한 다치고 나가. 엄마가 보증금은 줄게. 월세는 네가 해봐, 어때? ”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 나는 엄마에게 '예스맨'이 되었다. 제창이형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네, 알겠어요..”
집에 도착하니 제창이형과 원희는 벌써 밥 먹고 있다.
“걸어왔냐??”
“뭐래.. 태워서 오든가…”
차가 있는 제창이 형이 괜히 부럽다.
“야. 이따 밤에 술이나 마시자. 오랜만에. 3학년 되고 한 번도 안 달렸지??”
“어디서?”
“그건 네가 고민해야지 ㅋㅋㅋ”
제창이형과 원희는 나 때문에 알게 되었다. 원희는 키가 크다. 내 친구인 원희를 본 제창이 형은 바로 농구팀을 소개해 주었다. 원희는 원래 농구하던 놈이다. 그래서 나랑 같이 운동은 안 한다. 발이냐 손이냐로 1학년때부터 투닥 거린다.
“시끄러워. 그냥 집에서 먹어. 돈지랄 났냐? 엄마 오늘 고모네 가서 잘 거야. 집에서 먹고 자. 냉장고에 술 있어. 그거만 먹어. 몸상해. 내일 반찬들 알아서 가져들 가고.”
내 이랄줄 알았다. 다 엄마의 계획이었다.
나와 원희는 베란다 유리를 닦으라는 엄마의 명이 떨어졌다. 따지고 보면 원희 시키신 거다. 원희는 의자가 없어도 베란다 유리창 꼭대기까지 손으로 닦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그리고 제창이형은 차가 있다는 죄로 엄마와 농수산물 시장을 갔다. 인천이랑 강릉에 보내 과일 사러 가셔따.
제창이 형은 인천에서 왔다. 제창이형 부모님은 인천에서 조금 큰 체대입시 학원을 하신다. 형은 재수를 했다. 형의 부모님은 형이 재수를 할 당시 “잘 됐네!! 이 참에 기초 운동 좀 더 해!! 크하하하”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형의 성격도 분명 인천 엄마 아빠한테서 온 유전자 때문일 것이다.
원희의 부모님은 강릉에서 식당을 하신다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유명한 두부집이었다.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다. 원희는 강릉을 잘 안 간다. 당연하지만 얘기도 잘 안 한다.
“냉장고에서 알아서 꺼내 먹어. 엄마 간다. 조용히 놀아.”
“네..”
“아. 그리고 강릉 엄마한테 전화 왔어. 자기도 자기 아들 보고 싶데.”
“네….”
“ㅋㅋㅋㅋㅋ”
엄마가 나간 후 제창이 형이 냉장고를 열어 본다.
“야. 엄마... 이거 뭐 어쩌라는 거냐? 이거 먹으면 진짜 몸 상할 거 같은데??”
냉장고에는 소주 9병 맥주 6캔 막거리 3병이 있다… 우리 엄마 진짜…..
“뭐 369 게임이라도 하라시는 건가??
ㅋㅋㅋㅋㅋㅋ. 보라가 제창이 형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거다.
낮에 먹던 불고기를 데우지도 않고 프라이팬 채로 가져와 우리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야. 농원(농구하는 원희) 희경이랑은 살만 하냐??”
그렇다. 원희는 조파장 희경이랑 동거를 한다. 사귄다. 원희 키는 185, 희경이는 158이다. 우리는 그들을 메미랑 나무라 부른다.
“뭐 똑같아. 형은 안 힘들어? 왔다 갔다 하기.”
“뒤지겠다.”
형이 차가 있는 이유는 복학할 때 부모님이 차냐, 월세냐 고르라길래 차를 골랐다 한다. 그래서 형은 인천 집에서 차로 통학 한다. 보증금만큼의 차를 샀고, 월세만큼의 주유비를 받는단다. 그래서 형의 차는 좋은 차는 아니다. 지금 형의 차에는 인천으로 갈 사과가 실려 있다. 사과.. 효선이가 생각이 나야 하는데 그녀가 생각이 난다.
“야 베이비! 그 여자는??”
아씨.. 왜 이 타이밍에…
“어? 형 알아?”
“뭘?”
“그 상아..”
“상아가 뭐야 이름이야? 그 여자???”
젠장….
“아. 뭐, 없어. 뭐가 있어야 있지. 아냐..”
“뭐 있기는 바라고??”
“아 뭐래… 술이나 마셔 자.”
원희가 웃는다.
“야, 농원 뭐야 얘기해봐.”
“이 새끼.. 그 상아.. 좋아해. “
“아 뭐래 병쉰아.”
“형. 우리 조교가 뭐라는 줄 알아? 이 새끼가 갑자기 과사로 뛰어 오더만 신입 파일을 달래. 줬더니 그 여자 페이지를 보더니 얼더래. 그러더니 갑자기 창문을 보더래. 그래서 조교도 밖에 보니까 그 여자가 지나가더래. 조교도 눈치 깠지 뭐.”
아… 그날이다… 첫 문자가 온 날…. 껍데기 먹던 날..
“그리고 희경이도 그 미술비평이라는 수업 듣거든? 저 새끼랑 그 여자랑 둘이 과제하러 다니고~~ 아주 그냥~”
“이야~~ 우리 베이비 드디어 남자 된 거야? 멋있는! 사나이! 된 거야??? 이제 어덜트네?? 와썹 어덜트??”
다시 군대로 돌아가고 싶다. 아니 싫다. 그냥 자취방에 가고 싶다.
“형 그 상아.. 이제 우리 과 총무야.”
“? 효선인가 그 친구 아니야?”
“효선이가 휴학을 해야 해서 급하게 뽑았어.”
“엥?? 그럼 베이비랑 보라랑 그 상아랑 맨날 붙어 다니겠네?? 야이쒸… 야. 농원. 우리 축의금 얼마 줘야 되냐?? 아 쒸 기름값 아껴야겠네… ㅋㅋㅋㅋ“
“아 부라더!!”
나를 놀리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다. 민원인과 만나는 공무원.. 뭐가 로맨틱스럽게 느껴진다.
나를 안주 삼아 우리는 실컷 술을 마셨다. 술이 알딸딸하게 취한 제창이형이 말을 한다.
“야. 농원, 베이비. 그거 기억나냐? 우리 복학할 때, 나 차 살 때 농원 너가 그랬잖아. 차라리 형 차사고 베이비랑 내 돈 합쳐서 집 구해서 셋이 살자고. 그때 내가 한 말 기억나냐?”
“어.”
“난 너네랑 싸우기 싫다고…”
“그때 형. 진짜 형 같았어. 그때 원희 말대로 했으면 우리 싸웠을 거야.. 그렇지?”
원희가 한방에 정리한다.
“훗. 우리가 같이 살아서 싸웠다면 형 발냄새 때문에 싸웠을 거야 ㅋ”
“야이 쒸. 내 발냄새 덕분에 우리가 같이 안 살아서 이렇게 좋은 거야 이쒸..”
형이랑 원희가 좋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