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돌
'시험 공부 하는 건데.. 뭘...
그런데 굳이. 왜... 내 방에서...'
도서관의 2층 유리창을 보니 사람들이 꽉 차 있다. 3층 4층도 보이지는 않지만, 책에 코를 박고 있는 그들의 사람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다.
시험기간인것이 새삼 다시 느껴진다..
자취방까지 가는 15분 동안 음악을 듣는다. 내 모든 음악은 이어폰을 통해서만 들어온다. 스피커로 들을 수도 없다. 나는 롹 음악을 좋아한다. 메탈리카, 판테라, r.a.t.m, 건즈 앤 로즈.. 하지만, 요즘 바이올린에 빠져있다. 우연히 본 영상 하나. 고소현 바이올리니스트 영상이었다. 그녀의 연주보다는, 기타와 같은 줄로 연주를 하는데.. 느낌이 아주, 아주 많이 달랐다.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데 강했고, 강한데 여렸다. 높은데 날카롭지 않았고 뾰족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내 이어폰에서는 바이올린 소리가 자주 들린다.
음장 누나를 좀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제법 낮이 길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석조실을 정리하고 나온, 6시가 넘은 시간에도 사람들은 점심 먹고 이제 나온 사람들처럼 활기차다. 걷고, 뛰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바닥을 보며 걷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앞이 보기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많이 바뀌었다. 제창이형이 시킨 예스맨 이후로 많이 바뀌었다. 세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버지 장례 이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대로라도 되기를 바랬다. 내가 예스맨이 된 이후 엄마가 바라는, 엄마 마음대로의 내가 만들어지더라.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주고, 도와주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더라.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역시 없었다. 나는 바라는 건...특별히 없었다. 없다. 바닥을 보며 생각을 했다.
뭐지....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어느 대학, 무슨과를 갈까 하는 고민 조차도 없었다. 매일 매일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러다 조소,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만지게 된 흙의 느낌은 물감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기에서 만들기로의 큰 변화 였지만, 무언가를 재밌게 하는것이 좋았다. 사실.. 즐겨서 그런지 나름 실기는 학원에서도 인정을 받는 분위기 였다. 어느순간, 담당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넌... 실기는 좋은데.. 성적이 좀....." 그래서 필요에 의한 입시 공부도 했다.
대학을 왔다.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막상 오게된 미술대학은 내가 아는, 내가 했었던 물감과 흙이 없었다. 모든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그림과 흙이 단지 이곳을 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라는것을 알게된 것은 금방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한 대로 1학년때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다. 내가 찾아야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군대를 갔다. 아니, 오라 하더라. 운전병이라는. 다른 병과보다는 몸이 조금 편한 보직에 있었지만, 정신은 하나도 편하지가 않았다. 선임들의 갈굼을 피하기 위해 운행 나가는 것이 행복했다. 운행을 나갈 때면 정신과 몸은 긴장상태이지만, 귀는 편안하였다. 차 안에서의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다. 매일 한 권씩 들고 나와 운전석 옆에 두었다. 재미없으면 덮었다. 재밌으면 다 읽었다. 서서히..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책이라는 물건에 대한 신기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난, 책이 좋았다. 그때의 책은 고등학생때와는 달리 '학습'이 아닌 '경험'이었다. 책에서 많은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 얻음을 이용하여 다시, 빨리 미술이 하고 싶었다. 책은 내 그림과 작업에 대한 관념을 많이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 관념은 내가 알고 있었던 미술재료들의 관점을 다시 생각 하게 해 주었다.
군대 전역을 하고 난 뒤에는 엄마 가게 옆에 있는 제법 큰 서점에서 일을 하였다. 엄마의 지인분이 하시는 서점이었다. 엄마찬스였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는 일은 별거 없었다. 단지 운전병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흰색 1톤 트럭을 몰고 다니며, 책과 문제집을 다른 서점에 배달을 해 주는 일이었다. 사장님은 한 달에 책 한 권씩을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그냥 주셨다. 다 읽으면 그 책값만큼의 보너스도 주셨다.
잠깐 일을 하는 8개월 동안 나는 책이 좋았고, 트럭이 좋았다.
서점을 하는 것이 내 꿈과 목표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학교는 일단 졸업해. 그때 다시 생각해봐. 더 많이 경험하고, 시간을 써. 그럼 보일 거야.
공부하려고 책 파는 거지, 책 팔려고 공부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 일 시켜줄게."
서점 사장님의 말 한마디에 내 꿈은 꿈(목표)이 아니라 꿈(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학교를 왔다. 혼자 살고, 또 공부를 하고, 돌을 만지며, 학과일을 하고 있다.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지만..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고등학생때 처럼 마냥 재밌다고, 좋다고 미술을 하는것 같았다. 이제는 군대도 다녀 온 어른이다. 아직 까지도 이러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내년이면 졸업 준비를 해야 한다. 그때 까지도 내가 하고 싶은것만 쫒아 다니는건 아닐지 조금 걱정이다. 내가 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모르겠다. 주전자에서 선배 놀음을 한 내가 부끄러워진다. 숨고 싶다.
'아빠라면... 뭐라 했을까?....'
띠링.
-오빠. 상아 언니랑 지금 간다. 방 치워놔.-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를 끄게 만드는 문자이다. 방에 들어와 뭘 치워야 하나 둘러봤지만.. 없다. 뭐가 없다. 작은 냉장고 하나, 인터넷만 간신히 되는 서점 사장님이 주신 노트북 하나, 유일하게 내 돈으로 산 책장과 의자하나, 그리고 엄마가 사준 큰 밥상 하나. 전기밥솥 하나.
"엄마.. 뭐. 이리 큰 밥상.. 아니.. 책상이야? 뭐야?"
"밥 먹으려고 공부하는 거야. 공부하려고 밥 먹는 거고. 항상 깨끗이 닦아!"
서점 사장님이랑 친하게 지낸 우리 엄마 똑똑해졌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는데...
똑똑.
"오빠. 우리"
"어 들어와."
그녀와 보라가 들어온다.
"어차피 도서관도 꽉 찼고, 언니도 공부할 때 없대. 오빠 저 책상 크잖아. 그래서 왔어. 어차피... 오빠, 공부도 안 할 거 같기도 하고.. "
책상에 우리는 둘러앉는다. 나는 공책 하나만 펼치는데, 보라와 그녀는 가방에서 무엇인가 들을 이것저것 꺼낸다.
"오빠, 상아언니 공부 되게 잘 한데. 수능도 거의 1등급 이라는데?? 혹시나, 내가 우리 공부 좀 봐줘라 하니까 해주겠다는 거야. 대박이지."
"어.. 그래. 그러네. 고마워."
"아냐 학장. 나도 집에 가면 혼자 무섭고.. 같이 하면 원래 잘 돼."
"근데.. 여기.. 서.. 괜찮아??? 학사 가면...."
"그럼 우리 가??? 간다???"
아차.
"아. 아냐 아냐. 그럼 뭐 내가 커피라도 사 올게 기다려..."
문을 열고 나와 안도의 한숨? 걱정의 한숨?을 크게 내 쉰다.
"뜨아 하나랑.. 아아 하나랑... 그..."
그녀는 뜨아인지 아아 인지 모른다.
물어봐야겠다.
010-48..-....
뚜루루루 뚜루루루
네 학장.
어.. 커피... 뭘로 마실래요?
저 뜨아요.
아 네.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그녀도 뜨아파인가 보다. 나도 뜨아파인데...ㅎㅎㅎ
그녀는 확실히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필기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언니. 이걸 다 외어야 돼?"
"아니.. 여기서 추려야지. 선생님이 하는 말 중에 시험하고 상관없는 말이 더 많아."
"그걸 어떻게 구분해??"
"음... 직? 감??"
"아, 뭐야...."
그녀는 임재순 선생님이 했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우리에게 하나하나 다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보라는 열심히 적고 나는 열심히 들었다.
이상하다. 공부가 잘 되는 느낌이다. 보라도 나와 같은 느낌인지 우리는 10시까지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
고3 수능 한 달 전에도 이렇게까지는.... 기억이 없다.
"오빠. 배고프다. 밥 먹자. 밥 없어?"
"어?? 밥?? 없는데??"
"아... 체장오빠한테 밥 사달라 할까??"
"형도 오늘 공부한다고 인천 일찍 갔어."
"우리 편의점 가서 라면 먹어요. 나 그거 해 보고 싶었어."
그녀의 황당한 제안이다.
우리는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 되면 이런 낭만 꼭 해 보고 싶었어요. ㅎ 입시할 때랑은 좀 다를 거 같아서... ㅎ유치하죠."
"그럼 언니. 내가.. 더 낭만 있게 해 줄까???"
"예? 뭐요??"
"잠깐~~~~"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간 보라는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에??? 술 마시게요??"
"이 편의점 테이블에 컵라면만 있으면 고등학생, 소주도 있으면 대학생!"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공부해야죠~"
"에이 모, 셋이 나눠먹으면 두 잔 씩이에요. 많이 먹자는 것도 아니고."
"ㅎ 그러네요. 맛있겠다."
"맛있겠다고??????"
"아, 아니. 라면. ㅎㅎㅎ"
보라랑 그녀가 많이 친해졌다. 보기 좋다. 그리고 이 상황도 좋다.
아직 뜨겁게 덥지 않은, 오히려 시원한 이 밤이 좋다. 다 좋다.
우리는 새벽 한 시가 되도록 쓰고, 외우고, 말했다.
"아... 졸려. 소주 두 잔 이거 무섭네... 나 쫌만 잘래. 언니. 나 쪼금 있다 깨워줘요."
보라가 옆으로 누워버린다.
나와 그녀는 어색함을 이기고자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집중이 이제는 되질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 나도 쪼금만 잘래요. 학장, 혼자 외우고 있어요. 이따 10분 뒤에 깨워줘...."
그녀도 옆으로 눕는다...
조용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씩 보라와 그녀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와 보라를 깨워야겠다. 그녀를 흔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흔들 수가 없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정신이 혼미하다.
새벽 2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나?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나. 아니. 없었어야 한다.
처음 그녀를 본 3월의 첫날이 오늘 아침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꿇은 내 무릎이 펴 지질 않는다. 아니 펴고 싶지 않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물리학자들은 시간을 정의하는 것부터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의 정의는 쉽다. 지금이다. 영원하고 신비하고 소중한 지금이...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은 초점이 잡히질 않는다. 마치 a/s 센터를 가야 할 dslr 렌즈처럼.. 고장이 난듯하다. 그녀의 어느 한 곳을 볼 수가 없다. 어디를 보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그녀를 보는 것인지. 그녀가 있는 곳을 보는 것인지...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그제야 내 렌즈는 고쳐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움직일 수 없다.
한밤중, 산속 도로에서 자동차 라이트를 정면으로 마주친 고라니처럼 나는 움직일 수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누운 채로...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내 쿵쾅 거리는 심장 소리에 그녀와 보라가 깰 것만 같았다.
옷장에서 조용히 이불을 꺼내 그녀와 보라에게 덮어주고 나는 핸드폰과 지갑, 담배만 챙겨서 나온다.
책들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 위로 메모 한 장을 남긴다.
-나 학사에 가 있을게-
새벽 2시.. 길에는 나 혼자다. 미대 건물까지 걸어 올라간다. 새벽공기 정말 오랜만이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웃으며 나와 같이 걷는다.
피식 웃으며 혼자 걷는다. 공부라는 거 생각보다 재밌다. 시험 잘 볼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