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상하게 숨이 가빠왔다.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공기의 온도가 유난히 차가웠다.
마치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무언가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후, 하고 내쉬었을 때
그동안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방은 평소와 같았지만, 이유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평소라면 절대 너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유독 서랍 한 칸이 눈에 밟혔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그 서랍을 열어버렸다.
형광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눈에 띄는 작은 주머니.
프시케가 판도라의 상자를 바라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안에는 수많은 콘돔, 그리고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정말로 숨이 멎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온 것처럼 나는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 또다시 과호흡이 시작되는구나.
5년 전, 전 남자친구의 바람 현장을 목격했을 때 느꼈던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손이 떨렸다.
그럼에도 난 확인해야만 했다.
잔인하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사진 속에 너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꽃다발을 든 채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바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네 4년 된 여자친구였고,
타국의 너희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린 사이라고 했다.
지난 2년간 나는 우리가 연인이라 믿었다.
물론 너는 단 한 번도 관계를 명확하게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우린 어떤 관계야?"라고 물으면
넌 늘 피했고, "곧 떠날 거야"라는 말만 남겼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부담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단순히 바람이 아니라
내가 '세컨드'였다는 사실로 이어졌을 때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언제든 바꿔 끼울 수 있는 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은
내 얄팍한 자존심마저 짓밟았다.
게다가
4년 된 여자친구,
타국에 또 다른 여성과의 아이,
직업과 나이까지 모든 걸 속였던 너
알면 알수록 너는
껍질을 벗길 때마다 새로운 속살을 드러내는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왜 나를 속였어?"라고 묻자
너는 덤덤하게 말했다.
"재미였어. 너와 2년이나 함께 할 줄 몰랐어."
그 말 한마디가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마치 그 말 속에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라는 뜻이 다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넌 도망가버렸고
그렇게 난 절망을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내 생일날 밥을 먹고
너의 방 안에서 주머니를 발견했던 날을 제외하곤
한 달 하고 십몇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지워버린 거겠지.
그리고
바닥에서 나는
Chéri를 만났다.
이 이야기의 ‘너’가 될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