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
Chéri가 말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Chéri를 알게 된 건, 전 남자의 흔적을 찾던 시기였다.
앞서 말했듯, 내가 만났던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전 남자의 수많은 거짓말 속에서 진실을 찾던 와중, 문득 우리가 처음 만났던 데이팅 앱이 떠올랐다.
그 앱에서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다.
꽤 오래전이라 Chéri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앱을 다시 깔았다.
그리고 거기서 Chéri를 찾았다.
2년 전이라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Chéri는 그 앱에 있었다.
나는 Chéri에게 먼저 채팅을 걸었다.
눈에 뵈는 게 없던 나는 영상통화로 Chéri를 떠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 떠보기는 다섯, 여섯 마디도 안 돼서 들통났다.
내가 “어떻게 내가 만났던 사람이 그 사람인지 아는 거야?”라고 묻자,
Chéri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우리랑 같은 국적 가진 사람 몇 명 안 돼.
그 사람들 중에서 행동 별로인 사람? 걔 하나야.”
그때의 나는 전 남자와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2년이나 만난 그 사람은 여자친구도 있었고, 타국에 아이도 있었고,
나이와 직업까지 속였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가 막장 드라마 속 여주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꺼내는 순간 비난을 받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타인이라면 그런 얘길 들으면 “아니야, 너 잘못 없어”라고 하기보다는
“네가 멍청해서, 네가 미련해서 당한 거지”라고 생각할 것 같았고
“걔도 그렇지만 너도 참...” 같은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차라리 나를 전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아는 Chéri에게 말하는 게 더 쉬웠다.
나는 사설 탐정처럼 구글링해서 찾은 모든 정보를 Chéri에게 읊어댔다.
“이게 맞냐”고 확인하는 전화를 한두 시간씩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지막에 Chéri가 나에게 한 말은 이거였다.
“너 FBI야?”
내가 이성을 잃고 흥분하면 눈에 인광이 도는 편이다.
아마 오밤중에 갑자기 영상통화를 걸어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읊어댄다면,
나라도 ‘미친년’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날을 기점으로 배신감과 상실감이 휘몰아치는 밤이면,
나는 Chéri에게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그 수많은 날들을 함께 하소연하다가, 어느 날은 Chéri도 지쳤는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그때는 내가 많이 괴롭혀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자학은, 내가 회피 수단으로 꽤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 것 같다.
엄격하고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자학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별의 상실감을 견뎠다.
지금 와서야 Chéri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새삼 느낀다.
카톡과 전화만 수차례 주고받던 중, 어느 날 “보자”는 말이 나왔다.
밤마다 우는 내가 불쌍했는지 Chéri가 먼저 보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집 근처 역 앞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Chéri를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신기하게 생겼다?!였다.
이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과 외모의 결이 꽤 달랐다는 뜻이다.
그때는 이 사람과 사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역 근처 공원에 앉아서 나는 또 하소연을 쏟아냈다.
너는 묵묵히 들어주다가
갑자기 나에게 제주도에서 사 온 ‘제주 마음샌드’를 건넸다.
띠용?! 싶었다.
지난 통화에서 네가 제주도로 학회를 간다고 하길래, 내가 “마음샌드 유명하던데” 하고 흘려 말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걸 진짜로 주니 의아했다.
게다가 너는 “나도 먹을 거야”라며, 절반은 나에게 주고 절반은 본인이 챙겼다.
그 모습이 더 웃겼다.
‘애 진짜 뭐지…?’
주는 건 고마운데, 애는 도대체 무슨 캐릭터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 번째 만남은 닭갈비집이었다.
닭갈비와 맥주를 먹다가,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서인지 나는 식당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울어버렸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Chéri가 달래줘서 겨우 울음을 그쳤다는 것 정도밖에 기억이 안 난다.
세 번째 만남부터였다.
친구랑 노는 와중에 폰이 울려서 카톡을 확인하니
Chéri가 아르바이트를 제안해왔다.
전화를 걸어 내용을 들었다.
다른 나라 고위 공무원 가이드 역할이고, 일당 10만 원 이라고 했다.
"3시간에 10만 원이라니, 개꿀이잖아."
라고 생각하며 하겠다고 했다.
알바 당일 생각보다 많은 인원수에 놀랐고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서 더 놀랐다.
차라리 유치원 선생님이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사람들은 각 나라에서 고위 공무원이고 어른이기도 하니 요구 사항도 많고 고집도 있었다.
내가 어버버할 때마다 Chéri가 앞에서 사람들을 잘 통솔했다.
많은 요구 사항에도 그들과 소통하고 리더십 있게 행동하는 모습이, 그날따라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낯을 가리는 나에게는 너의 사회성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알바 시간이 끝났음에도 본인 개인 시간까지 써 가며 그들을 도우려는 너의 선함이 매력적이었다.
나에게 없는 너의 이타심이,
나에게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을까.
네가 달라 보였던 건.
그때부터였다.
너라는 사람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