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홀씨 하나

by tracebraise




타닥타탁 비가 내린다.

너의 집 안에 비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가 말했다.


“나 나갈 때 같이 나가야 해.”


“알고 있어.”


간단히 세안을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던 중,

“너 짐 다 챙겨서 가.”라는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헤어진 이후로

나의 자질구레한 짐은 모두 종이봉투에 담겨

옷장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남이 보기엔 별것 아닌 그 종이봉투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너무 쉽게 정리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더 서럽고 서글펐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친구가

너와 나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했다.


거의 9일 만에 너를 다시 만나는 자리.


한편으로는

너를 기다리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원피스와 구두를 사고,

처음으로 속눈썹 연장도 하고,

잘 하지도 않던 액세서리까지 풀로 장착했다.


너를 만난 순간,

“오, 왜 이래?”라는 말에

나는 목이 메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를 지나쳐

생일인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축하 인사를 건넸다.



파티 중에도

너는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하며 웃고 있었다.


잘지낸 것 같은 너의 모습에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파티가 끝나고

그가 집에 간다고 했다.


나도 친구에게 말했다.


“내일 글 쓰는 모임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와 단둘이 걸을 수 있는 순간만 기다렸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말했다.


“나 집 이제 뺄 거야.

보증금 받은 돈으로 비행기 티켓 사고,

출국 전까지는 고시원에서 살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 올 게 왔구나.


예상은 했지만

오지 않길 바랐다.



“왜 고시원에서 살아.

더 좋은 데 있잖아.

혹시 돈 때문이야?

내가 숙소 예약해줄게.”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너가 그걸 왜 해줘?

넌 항상 내가 뭐만 말하면 해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한테 계획 말하기 싫은 거야.”



늘 그랬듯

같은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는

피곤하다며 환승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타고 떠났다.



주인을 떠나보내는 강아지처럼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씨… 내 핸드폰 지갑.”


핸드백에 공간이 없어

그의 가방에 넣어둔 걸 잊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전화를 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내 처지가 딱해보였는지

한 중년 여성분이

전화를 빌려주었다.



내 전화로 두 통

그의 번호로 두 통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그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가는 내내 생각했다.

그가 집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단지 내 물건을 찾으러 가는건데

혹시 나를 스토커처럼 생각하면 어떡하지?



핸드폰과 지갑이 내 손에 없다는 사실보단

너가 나를 어떻게 볼지가 더 두려웠다.


그래서

발에 불붙은 사람처럼

애꿎은 발만 동동 굴렀다.


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경주마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5년 동안 운동했던 체력이

이 순간에 발휘됐다.


구두를 12시간 넘게 신고 있었지만

근육통도,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각또각

또도도도도도



빗소리와 발소리가 뒤섞였다.



그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달려오는 나를

그가 먼저 발견했다.



그 순간,



참고 있던 감정이

한 번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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