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조직의 사용설명서

엘리베이터 앞, 같은 순간

by 한그루

엘리베이터 앞, 같은 순간

(아무도 같은 장면을 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
복도는 늘 그렇듯 애매하게 조용했다.
누군가는 서류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퇴근할 마음이었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 틈에 론사나가 섰다.

화려했다.
과할 정도로. 빨간 코트, 반짝이는 장신구, 회사 복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감.
마치 “나는 이 공간의 규칙을 따를 생각이 없어”라고
미리 말해주는 사람 같았다.

론사나의 생각

아, 다들 표정이 똑같네.
괜히 눈 마주치기 싫어하는 얼굴들. 문제 생기면 다들 이렇게 된다니까.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고 있는데,
굳이 말 안 해도 된다고 믿는 표정.

저 중에
본인이 중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하나 있겠지.
항상 그렇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그 사람 얼굴부터 보일 텐데.

진고동의 생각

왜 하필 지금 론사나야.
이 시간에, 이 엘리베이터에서.

괜히 옷이 더 화려해 보인다.
사람들 시선도 다 그쪽으로 가는 것 같고.
저런 스타일은 늘 부담스럽다.
괜히 말 한마디가 의미심장해질까 봐.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인사만 하면 된다.
괜히 얽힐 필요 없다. 지금은 다들 예민한 시기니까.

문제는
이런 시기에 꼭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아무 말 안 하면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타입.

나의 생각

아… 하필 오늘.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저 옷, 저 표정.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보게 만드는 사람.

말 걸까 말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미 눈이 마주쳤다.
도망칠 타이밍은 지났다.

괜히 웃게 된다.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 설명하고 싶은 건 나뿐일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론사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 박자 쉬었다.
그 짧은 정적 안에 각자의 계산이 다 끝났다.

“여기서 보네.”

론사나는 가볍게 말했다. 인사처럼 들렸고, 사실은 인사 같지 않았다.

론사나의 생각

그래. 저 표정이네. 늘 저렇다.
본인은 아무 일도 안 했다는 얼굴.

사람이 문제를 만들 때는 항상 이런 얼굴을 한다.
‘왜 나를 보지?’라는 얼굴.

진고동의 생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벌써 기분이 상하지. 저 사람은 늘 그렇다.
웃으면서 사람을 재단하는 느낌.

괜히 커피 얘기라도 꺼내야 하나. 분위기만 넘기면 된다.
지금은.

나의 생각

엘리베이터 안 공기가 묘하게 무겁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미 대화는 끝난 느낌.

커피를 마시자고 한 건 아마 나였을 것이다.
이 상황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던 건 나뿐이었으니까.

잠시 후, 론사나는 컵을 내려놓고 말했다.
계산 끝났다는 표정으로.

“이건 또또 문제도 아니고,
사택 문제도 아니야.”

진고동이 잠깐 굳었다. 나는 숨을 멈췄고,
H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진고동 문제야.”

론사나는 웃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론사나의 생각

이제 이름 붙여줬으니 각자 알아서 견디겠지. 불편함도, 책임도.

진고동의 생각

왜 이렇게까지 말하지.
조금만 부드럽게 말해도 될 텐데.
사람들 앞에서.

아니, 왜 이 말이 이렇게 오래 남지.

나의 생각

아,
이게 그 말이구나. 그동안 설명만 하느라

끝내하지 못했던 말. 누군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릴 수 있는 말.

엘리베이터는 이미 한참 전에 내려왔는데,
그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순간.

하지만 아무도 같은 장면을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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