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끝에 ‘마지막’이 붙을 때,
우리의 감정은 동요되곤 한다.
이 수식어는 하필 나의 휴가 앞에 붙어서,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막’ 휴가.
선택에 후회가 없어야 할 텐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다녀와 본 곳 중 미련이 남는 곳을 갈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곳을 가볼 것인지 말이다.
어느덧 휴가지를 정해야 하는 날이 왔고,
선택의 순간이 왔다.
웬만한 도시는 가봐서,
이후는 나의 취향에 따라 달린 결정이었다.
페즈와 아가디르 중에 고심하다,
결국 나는 안 가본 도시를 가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정해진 나의 마지막 도시,
‘아가디르.’
이 도시는 휴양지로, 모로코 서핑의 성지이다.
여담으로, 나는 휴양 위주의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미가 확 당기지는 않았으나,
현지인 친구들이 추천하는 도시기에 가보기로 했다.
팀원들이 서핑을 하러 간다고 해서 호기심이 들기도 했고.
결정을 내리니, 점점 서핑이 궁금해졌다.
마침내 날이 다가왔고,
나는 연주와 함께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났다.
다녀와보고서 알았다.
고요하고 평온한 도시에서
뜨고 지는 해를 챙기며 보내는 하루는,
정말 온전히 내 것임을.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여행이지만,
흘러가는 대로 보내보는 것 또한 여행임을.
그렇게 나는 이 도시에서 온전한 ‘여유’에 대해 배웠다.
내 마지막 휴가지, 아가디르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모로코에서의 공식 활동이 모두 끝이 났다.
마라케시에서 모든 팀들이 모여 서로의 성과를
공유하는 행사도, 오늘로써 무사히 끝이 났다.
이제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마지막 휴가를 즐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
아가디르는 카사블랑카에서 가기는 힘들기 때문에
마라케시에서 보통 출발한다.
나 역시 이곳에서 바로 넘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시간은 편도 기준 CTM 버스를 타면
세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미리 지난 주 연주와 카페에서
숙소와 왕복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가디르로 향하는 오후.
나는 버스를 타면 늘 창가자리를 선호한다.
차창에 기대어 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이동하면,
그 마저 여행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익숙하게 창가 자리에 앉아
연착이 잘 되는 모로코 버스의 출발만을 기다린다.
오늘의 내 옆 좌석 동반자는 짐이 많은 할머니.
멋쩍게 웃음을 나누고, 다리를 조금 더 붙여
그녀에게 짐을 둘 공간을 만들어 드렸다.
그렇게 몸은 최대한 창가에 기대고,
시선은 창밖으로 둔 나는
눈 깜빡일 때마다 달라지는 창 밖의 풍경을,
더욱 빠르게 흡수했다.
그러던 도중 저 너머 비현실적이게 큰 무언가가
내리 앉는 게 보였다.
허리를 펴 그 물체를 정확히 보려고 노력했다.
그 정체는 바로 ‘해’였다.
처음 알았다.
해가 이렇게나 크게 질 수가 있는지.
‘아프리카의 해는 바로 이런 걸까?’
하는 경외심 마저 들었다.
‘해에게 압도당했다.’라고 표현해야 할까.
인상 깊었던 나는 그렇게 그 해가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경이로운 눈으로 그 찰나를 받아들였다.
아가디르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기에,
연주와 나는 곧장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갔다.
우리의 일정 중 이틀은 아가디르에서, 또 나머지 이틀은 탐라트에서 묵는 일정이었다.
대부분의 가게가 닫혀있었고, 인근의 열린 가게를 찾아 걸어보니
저 너머 보이는 타코 집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 사 온 타코와 숙소 앞 까르푸에서 마실 것과 주전부리를 사 와 숙소로 돌아왔다.
제대로 마주하니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숙소.
특히나 거실 공간에서 OTT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짐을 풀고서는 거실로 모였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비로소 여유롭게 쉴 수 있는 휴가였기에
그대로 잠에 들어 하루를 보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다음 날 서핑 레슨이 있었음에도,
넷플릭스로 영화 두 편을 연속으로 보며 새벽을 늘렸다.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본 뒤에야 내일 걱정에 얼른 자자며 곯아떨어진 우리.
12월의 서핑은,
내 첫 서핑은 참 특별했다.
12월에,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배웠으니 말이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다행히도 서핑강사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날씨 때문에 시간을 미뤄야곘다는 연락이 와있었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니 한 시간 정도 늦게 보자는 내용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숙소에 있고 싶었지만,
이미 예약을 해두었기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비를 맞으며 서핑을 해야 하는 걸까 ‘
내심 우려하며 숙소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서서히 개어가는 날씨와,
적당히 기분 좋게 바람 부는 날씨가
이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덕분에 서핑을 하러 가는 우리의 마음은,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30분쯤 걸었을까, 해변에 도착했다.
저 너머 누가 봐도 서핑 강사 같은 모로칸이 있었고,
우리를 보니 예약된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넨다.
운이 좋게도 그룹 레슨 클래스였음에도,
수강생은 우리 둘 뿐이었다.
덕분에 조금 더 많이 보드에 올라타볼 수 있었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수업을 들었는데, 문제 없었다.
발목에 줄로 서핑보드와 연결해 두어서,
보드를 잡고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웨이브의 파도를 눈여겨보며,
타이밍이 왔을 때에는 신호에 맞추어
서핑보드 위에 일어서는 것을 반복했다.
몇번 반복하다보니,
중심을 잡을 듯 말 듯, 파도를 탈 듯 말 듯
보드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게 묘하게 재밌었다.
힘든 것도 잊은 채 일어서는 것에만 집중했다.
파도와 합을 맞출 타이밍을 모르니,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파도에서 밀려나오면
다시 파도로 들어가는 과정이 반이지만,
일어서서 파도를 타는 그 몇 초가
얼마나 희열을 안겨주던지.
기회가 된다면
서핑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를
근육통과 뻐근함은 끝날 때쯤에 맞춰 서서히 몰려왔다.
그럼에도 ‘내일 또 타보면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을까?’
라는 희망과 기대감이 내 안엔 훨씬 더 컸다.
연주는 원래 서핑을 두 번하고 싶어 했고,
나는 한 번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내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나도 계획을 바꿔 또 한번 더 타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가디르에서 한 번,
그리고 타가주트라는 곳에서 한 번
총 두 번 서핑을 배웠다.
특히 두 번째 한 서핑은 그룹 레슨이었는데,
우리를 제외하면 모두 유럽인들이었다.
스트레칭을 다 함께 할 때 느껴지는 그들의 활기찬 에너지 덕분에,
함께 듣는 수업이 더욱 새롭고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참, 이 해변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하나 있다.
이슬람인 모로코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잠깐 났던 것.
스트레칭을 하고 돌아와 바다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데,
저 너머 유럽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아마 동반여행으로 휴가를 오신 듯했다.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자 머리에
산타 모자를 쓰고 태닝을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유쾌하고 닮고 싶던지.
나도 그들처럼 유치할지라도
현재의 재미를 즐길 줄 아는,
유쾌한 어른이 되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더 돌리니 저 멀리에도 산타모자를 쓴 낙타가.
눈앞의 귀여운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파라솔로 돌아와
업체에서 나누어주는 점심 도시락을 다 함께 먹었다.
지치면 파도에서 나와 파라솔에 누워 쉬고,
회복되면 다시 들어가고를 반복하니 어느새 두 번째
서핑도 끝이 났다.
더 탈 사람은 오후까지 타라고 했지만,
체력이 끝난 우리는 충분했기에 다시 벤을 타고 동네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른 해변에서,
다른 매력의 서핑 레슨을 즐겨 본 우리.
한국이었다면, 안정감을 찾아 거절했을 활동들도,
퇴사를 하고 의미부여를 많이 하고 떠나와서인지
마음가짐이 달랐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되도록 저항하려고 노력했다.
이곳에 와서는 웬만한 제안이나 활동들에
다 응해보려고 노력했다.
너무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면, 인생은 재미없으니까.
덕분에 얻게 된 재미있는 경험.
1년 전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오늘이기에
이 시간들에 감사했다.
오후에는 선셋 요가를 하기로 예약해 두었는데,
이틀 연속 서핑을 하다 보니 근육에 무리가 간 나는
레슨을 취소했다.
그리고 연주가 요가하러 갈 동안 나는 탐라트의 동네를 걸으며,
나만의 선셋 장소를 찾아냈다.
바로 여기.
이 타이어에 앉아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앉아있다 숙소로 돌아왔다.
이 이후 다음 모로코에 와서도 두어 번 더 갔었는데,
노을이 질 땐 나는 꼭 이곳을 찾아왔다.
내가 참 좋아하는 도시.
시골 마을 느낌이 확 풍기는 탐라트.
밤이 되고, 숙소로 돌아온 연주와 다시 만났다.
서로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며
오늘 저녁을 각자에게 말해주기 바빴다.
알차다는 것과 다른 의미로 알찬 그런 하루.
뭐랄까, 이 잔잔한 행복들이 차곡차곡 쌓여
여행 내내 만족감을 채워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낯설고 불편한 곳이 아닌, 평온하고 안정되는 기분.
처음 온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딘가
나의 동네 같은 느낌을 주는.
내게 그런 곳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해의 움직임에 따라 정해지는 하루의 일과.
해가 뜨면 마중 나갔다가, 해가 지면 배웅해준다.
큰 틀은 서핑 레슨 정도만 해 두고서,
나머지는 모조리 즉흥이다.
우리의 일정은,
여행 일정을 만들어둔 것 없이 시작하는 아침.
서핑을 끝내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
녹초가 된 몸을 끌고 숙소에 온다.
씻고 나와 다시 컨디션이 살아나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저녁이 되기까지 해변,
혹은 좋아하는 스팟에서 노을을 기다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시작되면 그 끝까지 함께 하다 돌아온다.
맥주나 인근의 와인 샵에 가서 와인을 사 와
로맨스 영화와 함께 홀짝이다, 새벽이 되면 다음 날을 위해 자러 가는 하루.
말한 이대로가 이번 여행의 도돌이표였다.
마지막 휴가를 가장 하는 것 없이 보냈는데,
여태의 여행 중 가장 마음이 충만했다.
온전히 ‘그 도시’를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해준 여행인 것 같아서.
굳이 무언가를 더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여행이지만,
흘러가는 대로 보내보는 것 또한 여행임을 온몸으로 배웠다.
뜨고 지는 해를 온전히 챙겨주던 날들.
좋아하는 바다를 혼자 원 없이 거닐 수 있었던 여행.
그래서 나는 유독 뜨겁게 떠 있는 해를 보면 이때의 아가디르가 생각이 난다.
여유가 이런 거구나,라는 것을 알려준 아가디르가.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카사블랑카로 돌아오던 날.
나는 이토록 애정하는 모로코로 다시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추후 에피소드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