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가?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갑자기 생각에 빠지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다. 워낙 생각이라는 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이니까...
나는 내가 그저 돌멩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누웠다.
소파에 누우면 움직이지 않고 노트북 앞에 앉아도 그대로 있으며 침대에 누워도 공상을 할 수 있는 나는 가끔 움직이지 않는 무거운 돌멩이 같단 생각을 해본다. 커피만 있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다.
나는 갑상선 저하증이 있다. 정확히는 하시모토 갑상선염이다. 그냥 평생 약 먹어라 이거지 뭐..
아침마다 잊지 않고 공복에 먹고 있다. 이건 살이 찐다는데 내가? 그랬더니 역시나 어느 날부터 살이 찌더라..
폭식하고 과식하고 식탐 있고 이런 성향은 다행히 아니라 아직 앞자리가 5이다. 난 169센티이고 그냥 보기엔 그럭저럭 날씬하진 않아도 통통하진 않을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 출산하고도 3달 만에 모유수유만으로 20킬로 가 쑥 빠져서 50킬로를 유지했던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몸무게지만 말이다. 빼고 싶지만 절대 빼기는 쉽지 않겠다 싶다. 남들은 살이 엄청나게 쪄서 힘들어한다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겠다.
약을 먹어도 해결되진 않은 만성적인 피로감과 무기력... 할머니보다 못한 체력은 답이 없다. 의사는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나의 저하증 동료들은 매우 공감하는 이야기다. 가장 힘든 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거든....
그리고 나를 늘 따라다니던 우울증... 난 그런 나를 '만성 우울 오타쿠'라고 부른다.
나는 17살 때부터 우울증에 깊이 빠졌었다. 덕분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3년 내내 죽을 고생을 했었고 수능날에도 어김없이 시험을 치다가 뛰쳐나갔다. 내 시험지는 언제나 반반이었다. 반은 허연 종이 쪼가리였으니까.. 수업시간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그냥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랬다. 시험을 치는 날에는 과호흡 증상도 왔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지만 몸에 힘을 주고 그냥 버텨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지금도 가끔 그러는데 그럴 땐 그냥 누워서 맥박을 체크하고 심호흡하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린다.
나는 20대가 돼서 서울에 올라갔다. 모르겠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고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홍대 근처에 원룸을 구해서 입시학원을 다녔다. 나와 비슷한 언니들과 함께 고딩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렸다. 한 번도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연필을 주고 그려 보라 하고 물감을 주고 칠하라 했을 땐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거 같았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뛰쳐나가고 싶어 벌린 일인데 일이 너무커졌다. 그림 그리는 건 재미있었지만 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림은 그냥 수단이었나 보다.
결국 난 버티다 그만두었고 미술심리치료를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공부도 하고 같이 공부하던 언니들과 인사동도 다니고 종로도 가고 그렇게 세상을 구경하고 다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원래 혼자서 무의식으로 깊이 들어가는 작업을 하면 위험하다고 경고를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작업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굉장한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내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깊은 우울에 풍덩 들어가 버린 것이다. 잠수를 탔고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방황을 시작했고 그 시간이 무려 5년이다. 나는 인생에서 5년을 잘라냈다. 남들이 예쁘고 화려하고 아니면 살벌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그 시기... 나는 버려진 5년을 살았다.
용기를 내서 전문가를 찾았다면 그랬다면 인생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거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기는 버려진 5년이다. 그 5년은 그냥 사라진 시간이다. 그 시간을 벗어나고 그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치고 또 쳤다. 그 시간은 내게 불행과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거든...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버린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생긴 가슴의 덩어리를 뱉어내고 그게 희미해지는데만 다시 10년이 걸렸다. 그냥 그래.. 지난 시간이니 잊자 잊어버리자... 이렇게 덤덤해지기까지 10년이었지.. 살다가 문득 떠올릴 때마다 덩어리가 훅 하고 올라왔으니까... 꽤나 억울하고 분하고 내 인생이 서글픈 그런 시간이었거든...
그냥 그랬다. 사라진 5년이 너무 아깝고 서러웠다는 게 맞겠다.
나는 그 시기에 과호흡과 지하철에서 쓰러지기 공황발작 증상 등등.... 참 다양하게 겪고 겪었다. 뭐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걸 그렇게 겪고도 그 당시엔 그게 뭔지 몰랐던 답답한 나다.
잊기 위한 10년을 지내는 동안 아이가 생겼다. 유난스러운 내 귀염둥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잊는 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버거운 육아를 하던 내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란 인간에 대한 명확한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나는 ADHD였다. 정확히는 주의력결핍이다. 과잉행동유형과는 다르다. 깨닫고 나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하나하나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학교가 힘들었는지 왜 직장이 힘들었는지 왜 인간관계가 힘들었는지 한방에 이해가 되었다. 깨닫게 되니 나 스스로 나를 관찰하게 되고 내가 주의력이 떨어지고 산만한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내 상태가 심했을 땐 외출할 때 행동 순서에 대해 1부터 10까지 메모지에 적어서 그대로 행동하기도 했었다. 동선까지도 적어놓고 하루 일과를 해냈었다. 수시로 시계를 봤지만 언제나 약속에 늦었고 긴장하고 지하철을 타지만 매번 반대방향으로 가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내 입에선 언제나 변명이 튀어나왔고 미안할 일들이 많아졌었다. 나는 늘 늦는 사람이었고 그게 상대방에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비쳤다. 나는 두 시간 세 시간 전부터 시계를 보고 준비를 하고 신경을 쓰고 그랬지만 언제나 결과는 그랬거든...
그리고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주 인상적이거나 내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면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수십 명을 기억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내 상태가 심해졌을 때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저께도 봤으면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 얼굴 보는 시간이 몇 초라할 지라도 기억해야 했다. 매일 반복되니 나도 지쳤었다.
이제는 내가 그렇다는 걸 더 정확히 알아서 모든 행동들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집안일도 내겐 버거운 일과일 뿐이거든... 그래서 집안일조차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으로 일을 해나간다. 엄마에게 듣는 소리는 언제나 느려 터졌다... 였다. 번개같이 빠른 엄마에겐 나무늘보와 동급으로 보였을 테니... 내 마음이 무척 바빴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지금도 일정이 생기고 외출을 해야 하면 나의 뇌는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모지를 꺼낸다. 그럼에도 언제나 난 빠르지 않다.
나는 내 아이가 내뱉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적이 있다. 너도 혹시...
" 엄마 나 머리 감았어? "......... 어.. 방금 감았잖아...
ㅜ..ㅜ 아이가 7살 8살 때 샤워만 시키면 그 소리를 해서 심장이 철렁했다. 내 아이도 그렇게 보인다. 관찰 중인데 주의력결핍과 가끔 보이는 과잉행동도 보이기도 한다. 차분하기도 하고 심하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어느 한 가지에 유난히 빠지기도 하는 모습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좀 더 관찰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의력결핍 쪽으로 더 방향을 잡는 거 같다. 매번 실내화를 신고 나오는 걸 보면...
나는 야단치지 않는다. 그냥 다시 갈아 신고 오라고 들여보낸다. 어쩌겠나.. 아이의 죄도 아닌 것을...
그리고 내 아이도 나와 같이 약을 먹어야 한다. 이 어린 나이에 약을 먹이려니 내가 죄인이 된 마음이었다.
임신 당시에 나는 저하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약을 먹었다. 소아과 선생님은 상관없다며 안심시켰지만 내분비내과 선생님은 엄마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말했거든...
너는 손가락 발가락까지 나를 닮았는데 왜 이런 것까지 나를 닮은 거니... 너는 내 아픈 손가락인 거니...
약을 먹이니 속이 안 좋다 하고 저녁을 일찍 먹이고 3시간...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려도 나는 물밖에 줄 수가 없다. 그냥 달래서 약을 먹여 재워야 하지... 덕분에 속이 더 안 좋아지고 있다. 그 약이 공복에 먹는 약이다 보니 아이의 약한 위가 부담스러운가 보다. 나의 미안함은 아이가 커질수록 더 커지고 있다.
아이는 8살이 되면서 책을 좋아했다. 유난히 책을 많이 봤고 결과적으로 시력은 너무 많이 나빠졌다. 그림을 그리던가 미친 듯이 책을 읽던가 그 두 가지를 맹목적으로 하던 아이였다. 아이의 꿈은 글을 쓰는 작가이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책을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화장실에 갈 때도 가져가고 샤워를 시키려고 준비하는 순간에도 책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목욕가운을 입고 먼저 나가서는 아까 보던 책을 또 보고 있다. 책을 못 보게 하니 이불속에 숨어서 보는 걸 뺏은 적도 있었다. 그 정도의 집착이었다. 한 가지에 유난스러울 정도의 집중을 보이는 부분도 ADHD 증상 중 하나이다. 그리고 예술적인 부분에 재능이 있다. 나와 너무 똑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 빼고 모든 것에 흥미가 있었고 재능을 보였었다. 유난히 리듬감이 좋아서 춤을 잘 췄고 치어걸도 했었다. 소풍 때마다 반대표로 나가던 아이가 나였다. 난 지금도 힙합 음악을 듣고 춤을 춘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공상을 즐겼다. 아이도 그림 그리는 걸 즐기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콩 심은 데 콩이 나지 팥이 날 확률은 애초에 없었나 보다.
내가 글을 써보니 알겠다. 나와 같은 사람에겐 글쓰기가 나를 살리는 방법이라는 걸... 이게 내가 살 방법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에너지는 아이로부터 왔다. 나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절박함이 나를 움직였고 아이의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 엄마! 엄마 꿈은 뭐였어? "
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매일 내 꿈을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홀린 듯 블로그를 시작했고 홀린 듯이 브런치를 시작했고 홀린 듯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제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고 나와 아이의 미래를 예쁘게 그려보게 되었다. 나를 닮은 내 아이를 나처럼 키우지 않기 위해....
나란 인간 참 답답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똑 부러지는 살림꾼에 아버지일까지도 완벽하게 보조해주는 엄마... 영특했던 남동생... 그 사이 어정쩡한 내가 있었다. 나는 이것저것 다 재능 있어 보이는 아이였지만 특별하지 않았고 그냥 어정쩡한 그 상태일 뿐이었다. 내가 자랄수록 나는 나에게 실망했고 내가 꿈꿨던 20대는 없었으며 내가 그렸던 미래도 뒤집어져버렸다. 모든 시간이 지나고 옆을 돌아보니 내 옆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아이가 있다. 나와 너무 닮은 또 다른 나다.
내가 자꾸 내 안의 불안에 잡아먹히려고 할 때마다 내 아이가 나를 건져 올린다. 정신을 차리게 한다는 거지...
내가 이제라도 앞으로 나가려고 바둥거리는 용기를 낸 건 순전히 내 아이 덕이다. 내겐 은인이지...
내가 글을 쓰는 힘이고 내가 꿈을 꾸는 동기가 되어준 유일한 존재이다. 마음이 지쳤을 때 아이를 끌어안고 살내음을 맡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바닥이 나버린 내 마음속 용기가 다시 자란다.
나는 매일 수십 번 아이에게 말해준다. 사랑한다고... 소중한 별이고 소중한 존재이고 내 마음은 너로 가득 찼다고 말해준다. 너를 사랑하는 사랑병은 영원히 못 고치는 병이라고 말해준다. 사랑한다고 말할수록 내 마음이 더 가득 차는 걸 나는 느낀다. 그게 내가 용기를 내고 포기하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나는 매일 수십 가지의 감정을 느낀다. 보통 사람은 나처럼 환상적으로 좋은 감정과 굉장한 만족감의 평온함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을 단 하루에 모두 느끼지는 않을 테지... 이런 내가 나도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냐... 그게 나인걸...
자석에 붙은 철가루처럼 나에게 붙어있는 엄마 껌딱지를 보며 내 마음을 계속 다듬고 다듬는다. 내 감정에 아이가 다치거나 영향을 받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니까...
그런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는 내 아이가 어여쁘다. 내 아이는 세상에서 고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전화번호에 나를 '내 소고기'라고 저장해준 고마운 아이다. '뽀뽀 쟁이 엄마'와 '내 소고기' 이 두 가지가 나다.
아이가 나를 본다. 엄마가 글을 쓰더니 진짜 작가가 되나 보다. 아이의 눈에 믿음이 생긴다. 나는 아이가 나를 더 믿고 함께 힘을 낼 수 있도록 매일 용기를 낼 것이다. 매일 넘어져도 또 매일 용기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