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만난 이야기

by 신관호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친구와 길이 나뉜 곳은 내 집까지는 아직도 두어 마장 남은 지점이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소재지 쪽에만 불빛이 서너 개, 정월 그믐께의 밤은 말 그대로 칠흑이었다.

희미한 석유 등잔불, 혼자가 아닌 공부방 등 공부하기 힘든 조건들을 생각해 학교에서 마련해 준 저녁 교실에서 공부한다고 모여 있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밤날씨, 목에 두른 수건은 귀를 감싸 다시 매어 야했다. 바람을 가르는 ‘솨 -‘ 소리가 조금은 기분 나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응달 곳곳에 희끗희끗 남은 잔설은 밤 분위기를 더욱 괴괴하게 만드는 듯하다.


수로를 지나 작은 솔밭길로 접어들 때 앞길 20여 미터 지점에서 희끄름한 물체가 보이는 것은 너 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갖 감각을 모아 그 물체를 지켜보며 계속해서 걸 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은 밤길을 걸을 때 놋 양푼에 숟가락을 한 다발 내려 던지는 소리 가 들렸다는 어른들의 얘기가 있어 밤길 걷기에는 좀 무서운 곳이었다.


나풀나풀 바람결에 흔들리는 물체는 분명 길을 따라 내게로 마주 오고 있었다. 귀신인가 도깨비 인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 모습은 흰 무명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등에서 는 식은땀이 흐른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선다.


이대로 계속 앞으로 가야만 하나? 아니면 돌아서 뛰어 수로 쪽으로 이어진 다른 길로 도망가야 하나?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다. 손바닥에 땀이 흐르기 시작해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서 뛸 자세를 잡아본다.


다시 떠오르는 생각. 아니다. 분명 아니다. 상대가 귀신 또는 도깨비라면 내가 뛰어서 도망친다 해도 그 손길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귀신이라고 해도 그 정도 따라잡기는 식은 죽 먹기일게 다. 만나 보자. 만나서 보자. 귀신이건 도깨비이건 이건 만나서 봐야 한다. 나는 돌아서려던 발길을 다시 돌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걸음걸이 옛말 그대로 여삼추다.


앞에서 오는 하얀 물체도 그대로다. 멈춰 서거나 돌아서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다가온다. 나풀나풀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까지 느껴진다. 멈추지 않고 소리도 안 내고 그렇다고 뛰지도 않고.


할 수 없다. 그대로 가자. 이 어둠 속에서 그대로 만나보자. 두 눈을 꼭 감고 걸어도 본다. 아니다. 똑바로 봐야지.


나 자신을 돌아본다. 손에 가진 거라곤 책과 노트가 들어있는 작은 가방뿐 하얀 물체. 그리고 나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한걸음 두 걸음 등이 굽고 지팡이를 집은 것 같은 사람 모양. 바람에 흔들리는 무명 치맛자락의 모양새가 점점 더 분명해진다. 7미터, 5미터, 3미터, 1미터. 갑자기 생각도 계획도 없던 나의 돌발행동이 나온다.


“안녕하세요?” 나는 좀 큰소리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하얀 물체는 약간 움칫하며 낮은 소리로 답한다. “누구여?” 앗차 이제 알만하다. 나는 뚜렷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랫마을 신 서방네 막내아들이에요.” 하얀 물체는 말한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서 가봐.”


그분은 확실히 동근 할매였다. 나이가 많으시고 조그만 체구에 등이 바짝 굽으셨고, 흰 무명옷에 머리까지 하야니 온몸이 그저 흰색이다. 분명 어느 집에 불려 가서 홍수막이 굿을 했던지 아니 면 성황당에 떡시루 놓고 거리제를 지내고 돌아오시는 것일 게다.
“안녕히 가세요.”
나도 이제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작은 솔밭을 지나 마른풀과 덩굴들로 덮인 재에 오르는 나의 걸음은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잰걸음이었다. 재 너머 내리막길 뛰는 듯 구르는 듯 내 집에 도착. 어른들 깨지 않게 사립을 열 고 마루에 올라 살그머니 열고 들어간 내 방에는 조카들이 먼저 잠들어 있다. 등에 흐르던 식은땀 은 이제 차가워져 춥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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