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신관호

잠결에 뇨의를 느껴 침상에서 일어나 내방 바로 옆 화장실로 향한다.

시원하게 방광을 비운 후 내 방이 아닌 공장으로 향한 옆문을 열고 농로에 들어선다. 다시 우회전하여 몇걸은 후 중간문을 열고 통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저편 마지막 문 앞에 시커멓게 서있는 커다란 물체가 보인다. 다시 보니 그것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조심스럽게 두 번째 발을 내 디디니 사람으로 보이는 그 물체도 움직인다.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집어든다. 그가 집어 드는 것은 부머랭이나 낫 같이 생긴 공격용 무기임에 틀림없다.

순간 등골이 오싹하며 위기감을 느낀다. 분명히 나쁜 의도를 가진 침입자다. 나는 허리를 반쯤 굽힌채로 돌진한다. 번개같이 몸을 날려 상대방의 가슴쪽을 사력을 다해 들이받는다. 갑작스런 공격에 상대방은 소리도 못 지른채 거친 속도로 밀려 공장으로 가는 마지막 문을 등으로 밀치고 밖에 펼쳐진 마당으로 나가 떨어진다.

“ 너, 뭐야, 가!”


갑자기 나의 방문이 열리며 건너방에서 자던 아내가 들어온다.

“ 여보, 왜 자다가 소리쳐요, 꿈 꿨어요?”

아. 내가 꿈을 꿨구나.

다시 누워 생각했다. 어찌 이런 꿈이 보였지?

십여년전에 있었던 비슷한 기억이 떠오른다.

한 여름 밤이었다. 에어콘도 설치하지 않았던 시절 무더위가 스라브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저녁 희미한 등불밑에 낮에 쌓인 피로와 졸리움으로 실구들 모두 넓은 거실 여기 저기에 흩어져 누어 잠들어있고 나는 소파에 앉아 옅은 잠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깨어 보니 사람 하나가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 문을 열고 들어선다. 키와 체격 만만치 않은 젊은이의 모습이다. 나는 깜짝 놀랄 새도 없이 일어섰다.

“ 너 뭐야.” 저절로 기가 모아지며 위압감이 담긴 큰 소리로 외쳤다.

청년은 놀란 듯 우물우물 대답한다.

“ 저 문당리에 사는 아무갠데요.” 대답하는 청년은 허우대가 멀쩡한 모습이다. “왜 왔어. 이 밤중에, 문도 두드리지 않고?”

더듬거리는 그 청년은 그리 악의는 없어 보였다.

“ 모임이 있어 가던중 불이 켜있어 들어왔어요.”

“잘못 들어왔어. 어서 가”

나의 단호한 어조의 호령에 청년은 천천히 발을 돌려 문밖으로 사라진다.

청년을 따라 나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들어와 식구들 모두 깨워 각자의 방으로 들여 보내고 나서야 나도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후에 들으니 인근에 사는 좀 정상이 아닌 청년 하나가 가끔 그런 짓을 한다고 했다. 나와같이 겪은 집이 두어집 더 있다고 했다.


지난 겨울 감기에 걸려 며칠 누워 지내던 중 인터넷 안의 책읽기방에서 프로이트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나는 구절 하나 “ 이유 없는 꿈은 없다.”


내 가정을 갑자기 쳐 들어온 두사람. 정체 모를 사나이와 정상이 아닌 청년 이들은 내 가정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데 어떤 모습으로든 위험을 느끼게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내 앞에 사람으로 나타났지만 사람이 아닌 자연 재해 또는 질병 등 다른 요소일 수도 있다.


나는 스물 일곱 살에 동갑내기 처녀인 아내와결혼했다. 공주 계룡 출신의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중 이웃에 사는 나의 누님 눈에 들어 동생 댁으로 점찍히게 된 것이 나와 결혼하게된 계기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노부모를 모신 총각에게 시집온 아내의 첫 결심은 “ 이 집은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일으키고 말겠다”였다. 나는 책이나 읽고 좋은 친구들 만나기를 즐기는 등 현실감에서 저만큼 떨어지는 풋내기 농사꾼이었다. 우리 부부는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얼마안되는 농사를 지으며 아들, 딸, 아들 순서로 아이 셋을 낳았다.


나름 열심히 살아서였는지 결혼생활 6년만에 내가 사는 집터 이천여평을 큰형님으로부터 인수했다. 아버지께서는 그것도 못보고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는 같은 아들이어도 늙어가시는 큰형님신세를 안지게 된 것을 몹시 후련해 하셨다. 그 이유는 친척의 땅에 소작농으로 오래 사시다가 땅 주인이 그땅을 팔게되니까 큰형님께서는 본인의 땅을 팔아 아버지 어머니를 사시던 터에서 사시게 해주신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수과정에서 일부 채무를 지게 되고 그 채무는 기타비용, 생활비들과 함께 점점 커져만 갔다.

내가 서른한살 되던해 친구들과 함께 중동취업의 길에 나섰다. 중동에서 일하게 된 곳은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있는 건설현장이었다. 경험이 없는 건설현장의 일을 배워가며 열심히 일했다. 나도 나지만 집에 남아있는 아내는 아이들 키우며 늙으신 시모를 모시며 논밭농사, 겨울엔 산에 가서 뗄 나무를 해오며 무척이나 힘든 생활을 열심히 견뎌냈다. 그때는 전화도 없는 시절이니 틈틈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전하며 서로 격려했다. 중동근무 1년이 다 되어갈 즈음 아내의 편지에 “당신 고생하며 벌어서 보내준 돈으로 빚은 다 갚았으니 이제 우리 잘 살아갈 준비를 위해 1년만 더 고생하고 오라”는 뜻을 전해왔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고 공사 현장도 사람이 더 필요했었기 때문에 1년 연장근무가 허락되어 1년을 더 일하고 집에 와보니 아내는 낙농을 하는 내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보내준 돈으로 젖소 암송아지 다섯 마리를 사서 키워 모두가 새끼를 밴 상태였다. 이것이 나의 낙농업의 시작이었다. 아이들도 많이 자라서 다섯 살짜리 막내 아들은 늘 장화를 신은채 젖소들 옆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로 축사를 짓고 놀이터도 만들고 얼마 안있어 소들이 새끼를 낳고 젖을 짜게 되니 어엿한 목장이 되었다. 그렇게하기 세월이 흘러 막내가 농대를 졸업하고 같이 일하게 되었다. 막내는 집에 오면서 축사를 규모를 갖춘 건물로 다시 짓는등 적극적인 낙농인이 되어갔다. 그즈음 「목장형 낙농공장」이라는 새바람이 불어왔다. 막내는 목장형 유가공협회에 가입해 전문 교수들의 교육을 받고 낙농 선진국 견학등으로 견문을 넓혀 가던중 가공사업을 할 결심을하고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아내도 충남대 유가공 교육원에 가서 치즈와 요구르트 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아산재단의 지원으로 10여명의 여성 낙농인들과 함께 스위스, 독일등지로 10일간 연수여행도 받으며 목장형 유가공 공장의 꿈을 키웠다.


가공공장을 지으며 대학에서 경영학을 배우고 대전에서 직장에 다니던 큰아들이 내려와 가공을 배우며 합류하게됐다. 큰아들은 가공체제를 갖추기 위해 대학교수를 초빙해 가공기술을 익히고 연수하는 단계도 거치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가공을 맡은 낙농인의 자격을 갖추기에 노력했다. 그리고 바로 가공판매업을 시작했다.


워낙 짧은 기간에 무리하게 추진해 나간 일이라 요구르트 생산판매를 하게된 시점에서 누적된 채무는 무려 10억원 정도 되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는 하나되어 열심히 일했다.


큰아들은 가공장에서 작은아들은 농장과 축사에서 나와 아내는 착유실에서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많던 채무도 갚았고 삼남매는 결혼해 중고생들의 학부모가 되었고 공장은 규모는 작으나 제법 체계화된 생산라인도 갖추어졌고 우리 요구르트도 고객들에게 인기가 있어 판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앞에 있었던 꿈과 현실 두건의 일들은 우리 가족들을 다시한번 긴장하게하고 재무장 하게하는 계기를 주는 암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약간은 지쳤던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고 공장도 지역의 환경농법과 나란히해 더욱 새롭게하고 경영현실과 맞추며 조금씩 개설해 나가야 하겠다. 이제 손자 손녀도 많이 자라서 먼저 결혼한 둘째아들이 낳은 손자는 이제 고3이 되어 낙농을 배울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여 후계낙농인의 꿈을 키우고자 한단다.


그렇다. 똘똘 뭉쳐 부지런히 일하는 우리 가족 앞에 오는 어떤 침입자도 물리칠 수 있고 어떠한 난관도 헤쳐나갈 수있다. 나는 비록 늘어가는 몸이지만 식구들과 함께 더욱 용감해지리라.

keyword
이전 07화용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