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게임 인생의 첫 장을 펼친 건, 초등학교 2학년 당시 넥슨에서 출시한 ‘메이플스토리’ 였다.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단순한 조작법, 흥미로운 판타지 세계관에 초등생들은 단숨에 매료됐다. 이전에도 ‘바람의 나라’가 온라인게임 붐을 이끌고 있었지만, 20레벨 이후로는 월정액 으로 전환되는 엄청난 진입장벽이 있었다. 게임을 학업의 ‘방해꾼’으로 여기는 부모들이 결제를 해줄 리 없었다. 때문에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메이플스토리는 그야말로 대세 게임이 됐다.
지금이야 유튜브, 공식카페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공략을 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운영되지 않았다. 있다 하더라도 뭘 잘 모르는 초등생들에게 정보를 접할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직접 부딪치고 찾으며 맵 곳곳을 돌아다녔다. 설레는 마음으로 세계를 탐험했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만나, 스치기만 해도 비석이 떨어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다. 포탈을 탈 때마다 배경이 바뀌고, 새로운 음악이 들리고, 처음 보는 몬스터와 마주하는 경험은, 마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모험’ 그 자체였다.
현실에선 힘든 '모험'을 가상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
초등학생 때는 옆 마을만 가도 생소한 환경에 주눅이 들었다. 걸어서 고작 20분 거리인데도, 처음보는 아파트와 상가에 둘러싸이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엉엉 울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봤다. 그런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를 줄여준 것은 다름 아닌 메이플스토리였다. 호기심을 따라 새로운 지역으로 가더라도, 죽으면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때문에 리스크(경험치가 줄어들긴 하지만, 애초에 모험을 할 때는 0%를 유지)가 없었다. 오히려 ‘이번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도전정신도 생겨났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하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은 곧 이목을 끄는 화젯거리가 되곤 했다. 언제나 새로이 본 것에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이야기하고 나면, 다른 친구들도 사실과 거짓말의 경계를 넘나들며 왈가왈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가상세계에서 일어난 일이 현실에서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닳도록 읽어본 적도 그때가 처음이다. 서점에 개시된 ‘메이플스토리 공식 가이드북’은 정보를 접할 창구가 없었던 당시, 필독도서보다 중요한 책이었다. 물론 특전처럼 제공되는 ‘메이플 포인트’가 목적이기도 했다. 정보도 얻고 캐시까지 받으니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게임을 하지 못할 때도 게임 속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책가방 속에 교과서는 빠뜨려도 메이플스토리 가이드북은 항상 넣고 다녔다.
메이플스토리 10주년 기념 공식 가이드북
가이드북과 함께 주어진 소정의 캐시가 나를 과금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 또한 분명하다(아주 똑똑한 전략이었다). 당시엔 꾸미기를 목적으로 한 치장아이템이 유일한 과금 형태였다. 가이드북을 통해 획득한 캐시는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에(4천 포인트) 마음에 드는 옷을 사기엔 부족했다. 결국 타협을 해서 어쩐지 촌스러운 디자인의 옷을 사거나(캐시템이라는 점에서 메리트는 있었으니) 원하는 부위 하나만 골라야 했다. 자연스럽게 결핍이 생기고, 소심하게 장바구니에 넣어둔 옷들을 다 사고 말겠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카드결제는 물론이고 휴대폰 결제도 불가능했던 때다. 무통장입금이 있었지만 초등생에게는 낯설고 무서운 시스템이었다. 그러던 와중 손쉬운 해결책이 나타났다. 바로 ‘문화상품권’ 결제였다.
열심히 모은 과자 값 5천원을 문방구에 가서 문화상품권으로 바꿨다. 동전으로 스크래치를 긁어서 나온 코드를 결제 창에 입력했다. ‘혹시 안 되면 어떡하지...’싶은 걱정도 됐지만(누군가 내 문화상품권 코드를 써버렸을 수도 있다는 괜한 걱정) 다행히 적립된 캐시를 바라보며 흐뭇해졌다. 현실 옷은 부모님이 사주는 대로 무신경하게 입으면서도 게임 속 내 캐릭터가 입는 옷은 특별했으면 했다.
3, 4학년 즈음 되자 세상의 변화가 뚜렷해졌다. 휴대폰이 없는 어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뚱뚱한 화면의 브라운관 모니터도 자취를 서서히 감췄다. 새로운 아지트도 생겼다. 지하로 내려가면 무려 200좌석이 구비된 PC방이 생겼다. 학교가 끝나면 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를 든 초등생들이 죄다 PC방으로 몰려갔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과 모여서 커닝시티 파티 퀘스트를 진행했다. 이따금씩 친구의 부모님이 PC방에 들이닥쳐 산채로 잡혀가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 pc방 풍경. 즐거움과 무서움이 공존했다
그 시절 PC방은 친근하면서도 왠지 무서운 곳이었다. 초등생들은 대부분 카운터 앞에 있는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는데, 그 구역을 벗어나면 어른들이 담배를 태우며 알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 구역 너머로 가야만 했던 화장실에는 어쩐지 주머니 속 얼마 남지 않은 동전마저 빼앗을 것 같은 무서운 형들이 있었다. 시끌벅적한 우리들은 공공의 적이었고,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게임을 해야 했지만, 가끔은 흥미로운 볼거리를 맞이할 때도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고렙 유저가 우리 PC방에 출몰한 것이다.
당시 메이플스토리의 레벨업은 자비 없는 반복전투(일명 노가다)가 필수적이었다. 주로 주문서작에 이용되었던 ‘노가다 목장갑’은 메이플스토리의 레벨업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아이템 명이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몰래 게임을 하던 우리들에게 레벨업 마지노선은 보통 30~40 전후였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해매는 아이들에게 끈기는 사치였다. 길고 지루한 30레벨 구간을 넘기기보다 아직 해보지 않은 직업의 캐릭터를 다시 키우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 마의 구간을 훨씬 넘어 선망의 대상이 된 유저를 실제로 보게 된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소문을 접한 아이들이 PC방에서 만난 나이 지긋해 보이는(지금 내 나이쯤 되려나) 고렙 유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시끄럽게 하면 주위 어른들에게 혼나기 때문에 조용히 화면을 지켜봤다. 아직 싸워본 적 없는 몬스터, 써 본 적 없는 스킬,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데미지 수치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 순간, 그 이름 모를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꿈과 목표를 안겨줬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그러나 초등생의 끈기는 작심삼일에 그쳤다. 새로운 게임이 물밀 듯 쏟아지는 변화에 따라 우리도 이리저리 편승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메이플스토리는 종종 플레이했고, 잠시 쉴 뿐이지 완전히 접은 적은 없었다. 타지로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편안하게 다시 할 수 있었다. 업데이트로 많은 변화가 있어도, 워낙 익숙한 세계였기 때문에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출시 20주년을 맞이한 메이플스토리
이렇듯 내 초등생의 추억은 메이플스토리와 함께였다. 모험과 꿈이 뒤얽힌 대장정이었다. 이제는 그토록 선망했던 아저씨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다. 여전히 서비스 중인 메이플스토리는 눈에 보이기엔 그대로지만, 게임 속 환경은 그때와는 사뭇 다르게 변화된 것 같다. 그때의 추억을 안고 성장한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환경으로 바꾼 것일까.
가끔씩 그리워서 유튜브에 메이플스토리 BGM을 검색해서 듣는다. 댓글을 보면 향수에 젖은 어른들의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 감정에 동감한다. 모험으로 가득했던 세계는 경쟁으로 가득한 사회생활에 밀려났다. 재미 하나로 뭉쳤던 관계들은 사라지고 서로 다른 목적을 품은 관계에 적응해야만 했다.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럼에도 메이플스토리는 잊히지 않고 굳건히 남아있다. 그때 느꼈던 설렘, 공포, 환희의 감정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