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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글렛 Mar 31. 2023

내겐 너무 따뜻한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삼촌은, 마치 나사(NASA) 직원처럼 보였다.

지금도 문득 생각나는 아주 어린 시절 기억이 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막 대학생이 된 삼촌이 '스타크래프트' 복제판 CD를 구해왔다. 기찻길 옆 허름한 주택에 살던 우리 집에 컴퓨터란 게 생긴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여태껏 놀이터 탐방만 했던 나는, 당연히 컴퓨터 게임이 뭔지 몰랐다. 삼촌이 설치를 마치고 스타크래프트를 실행했을 때도 그것이 게임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영어)와 어두침침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메인 화면에 지레 겁을 먹었다.


“삼촌, 이거 뭐 하는 거야?”


삼촌이 말없이 초록색 형광 빛으로 된 글씨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놀랍게도 삼촌은 영어를 읽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집중하는 삼촌의 모습은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처럼 보였다.

처음엔 다소 충격적이었던 비주얼. 노란 형체는 우측 하단에 있는 유닛 생산 아이콘이다.

삼촌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고 나니, 화면에 난생 처음 보는 징그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형용하기 힘든 괴물들이 브라운관 모니터 안에서 꿈틀댔다. 마우스를 똑딱 클릭하니 괴물이 움직였다. 자원을 캐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돈(미네랄)이 모이자 오른쪽 아래 노란 형체가 반짝였다. 나는 그 노란 형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거 엄청 어려운 게임이야.”


드디어 입을 연 삼촌이 노란 형체를 클릭했다. 애벌레 같은 것이 피를 뒤집어쓴 계란이 되더니 톡하고 터졌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두 마리 괴물이 튀어나왔다.


“이게 저글링이라는 거야.”


저글링들은 일하는 괴물과는 다르게 더 빠르고 무서워보였다. 삼촌은 저글링 두 마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둠이 드리운 적갈색 사막을 냅다 뛰게 하고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마치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게임을 종료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이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마치 꿈속에서 본 것처럼 희미했던 노란 형체. 그 이미지가 줬던 몽환과 위압감. 삼촌은 그저 저글링을 뽑았을 뿐인데, 나는 마치 국가의 중대사를 홀로 해결한 사람을 보듯 우러러봤다.


이후로 삼촌이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마다 옆에 꼭 붙어서 구경했다. 저글링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히드라도 있었고, 뮤탈리스크도 있었다. 심지어는 다른 종족도 있었다.


호기심에 나도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허공을 몇 번 클릭해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겐 너무 생소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결국 다시 삼촌에게 마우스를 넘겼다.


시간이 지나고 삼촌은 제법 부대를 꾸릴 수 있게 됐다. 맵을 가득 채운 건물과 유닛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닛을 조종해 우주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삼촌은 마치 나사(NASA) 직원 같았다. 삼촌은 내 선망의 대상이 됐다.

공포의 메인 화면. 당시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삼촌이 학교, 아르바이트를 가고나면, 나는 조심히 컴퓨터를 켜서 스타크래프트를 실행했다. 하지만 영어투성이인 게임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메인 화면에서 무엇을 클릭할 줄 몰라 이것저것 눌러만 보다가 종료하기 일쑤였고, 어쩌다 실행하게 된 캠페인 모드는 마찬가지로 영어로 된 명령어를 이해하지 못해 이리저리 유닛만 움직여볼 뿐이었다.


결국 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삼촌은 자상하게 어디 어디를 누르면 된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그 짧은 과정이 내겐 너무 어려웠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야 혼자서도 싱글플레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삼촌이 대단한 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제대로 된 부대를 꾸리기도 전에 적의 습격을 당해서 패배했다. 삼촌의 말마따나 컴퓨터 게임은 지나치게 어려웠다. 감히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하려 했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때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삼촌은 ‘치트키’라고 하는 신기술을 익혀서 내 눈앞에서 시현했다. 티끌처럼 모였던 돈(미네랄)이 갑자기 만원이나 불어났다. 과연 모든 것을 다 사고도 남을 액수였다. 삼촌은 노트를 보며 이것저것 타이핑을 했다. 칠흑같이 어둡던 맵이 한순간에 밝아지고, 일꾼이 적의 공격을 받아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삼촌은 위대한 문장이 적힌 노트를 내게 건넸다. 가장 위에 있던 문장은 ‘show me the money’ 였다. 내 인생에 가장 처음으로 배운 영어 문장이었다. 나는 노트에 적힌 모든 문장을 한자 한자 서투르게 타이핑 하며 스타크래프트를 즐겼다. 일을 안 해도 돈을 얻고, 적이 공격해도 죽지 않는 불공평한 양상이었지만 그저 재미있었다. 우월감에 빠지기 쉬운 나이였다.


삼촌이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컴퓨터는 내 차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치트키 없이는 제대로 된 한 판을 즐길 수 없었다. 상대인 컴퓨터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유치원생은 죽었다 깨어나도 컴퓨터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너무 강한 상대였던 컴퓨터...

시간이 지나고 점점 스타크래프트를 실행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컴퓨터를 조작하는 방법을 깨우치고는 다른 게임을 찾아서 해보기도 하고, 문방구에서 게임 CD를 사오기도 했다. 삼촌은 군대를 갔고 나는 컴퓨터를 하며 삼촌의 휴가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촌도 컴퓨터가 처음이었고, 게임이 처음이었다. 영어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카가 옆에 꼭 붙어서 우와, 우와 소리를 연발하니 당황했던 게 아닐까.

 

오래된 게이머들에게 스타크래프트는 혁명에 가까운 게임이고, 열광할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나에게 스타크래프트는 ‘삼촌’과 함께한 추억으로 집약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촌도 컴퓨터가 처음이었고, 게임이 처음이었다. 키보드를 똑딱똑딱 두드리는 모습에 컴퓨터 전문가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지만, 사실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이리저리 눌러봤던 것임을 이제는 안다. 메뉴 속 영어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카가 옆에 꼭 붙어서 “우와, 우와” 소리를 연발하니 적잖이 당황했지 않았을까.


RTS(실시간 전략게임)시대가 저물어, 이제는 스타크래프트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결혼을 해서 얼굴보기 힘들어진 삼촌과 같다. 삼촌은 나사(NASA) 직원도, 과학자도, 국가의 중대사를 해결하는 사람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상함만큼은 여전하다.


또 하나 바뀌지 않은 건, 나이를 꽤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나는 컴퓨터를 상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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