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액티비전 블리자드(이하 블리자드)의 신작 ‘디아블로4’가 오는 6월 정식 출시를 앞두고 오픈 베타 얼리 액세스를 시행했다. 평가를 보니 평타는 친 듯하다. 호불호가 있긴 하지만, 전작을 해봤던 팬들은 디아블로다운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다고 호평했다. 떠들썩했던 가격논란도 어느 정도 잠재워진 것 같다(1월 19일, 일반판 기준 95,900원에서 84,500원으로 인하했다). 이변이 없는 한, 정식 출시하면 그럭저럭 잘 팔릴 것 같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게임이 출시된다는 데,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새 게임이 출시될 때의 설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라 말하던 블리자드. 정작 본인들은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있는가.
근래 블리자드가 내놓은 게임들을 보자. 가장 최근에 출시된 건 ‘오버워치2(2022.10.05)’다. 전작 오버워치가 7년간의 서비스를 종료하고(2016~2022) 후속작으로 출시됐다. ‘2’라는 넘버링을 붙이기엔 시스템적인 부분 몇 가지만 고쳤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개선되고 진화한 의미의 ‘2’보단 전작의 문제점을 고친 정도의 ‘Fixed'가 더 맞아 보인다.
일명 ‘님폰없’ 사태로 유명했던 ‘디아블로 이모탈’이 지난해 6월 출시됐다. 아유와 비판에 시달렸던 것과 달리, 모바일로 이식된 디아블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많은 유저가 플레이했고, 나 또한 그랬다. 침대에 누워서 열심히 장비를 맞추고 있는데,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닌텐도 스위치로 ‘디아블로3’를 플레이했을 때와 똑같다. 전투도, 액션도, 파밍도, 새근새근 잠이 드는 것 까지 판박이다. 손에 든 것이 휴대폰이고, 이상한 과금 모델만 추가됐을 뿐이다.
다른 게임도 마찬가지다. 후속작·확장팩·레저렉션·리포지드·벤치마킹으로 블리자드의 개발 10년을 설명할 수 있다. 예외가 있긴 하다. 바로 7년 전(2016년)에 출시한 ‘오버워치’다. 8년 전 처음 공개된 오버워치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참신함 그 자체였다. 시종일관 어두컴컴했던 블리자드가 이런 시도를 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디즈니-픽사 풍의 트레일러는 예상을 벗어난 놀라움이었고, 출시된 게임은 블리자드답지 않은 신선함이 있었다. 그런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하스스톤’과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하 히오스)’도 새롭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두 작품은 블리자드가 그간에 쌓아올린 IP(지적재산권)를 활용한 벤치마킹에 지나지 않는다. 하스스톤은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든 CCG(Collectible Card Game. 수집형 카드게임) 장르 게임이다. 마니아 성향이 강했던 CCG 장르에 친숙한 IP를 덧씌워 성공한 케이스다. 히오스는 ‘도타2’와‘리그 오브 레전드’의 흥행을 지켜본 블리자드가 2015년에 뒤늦게 뛰어든 AOS 게임이다.
비단 블리자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업계 전반에 참신함이 실종됐다. 기존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살짝만 비틀거나, 여러 방식을 가져다 믹스하는 것 정도가 요즘의 트렌드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 배틀필드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GTA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포켓몬스터 시리즈 등 온갖 시리즈 열풍이다. 배틀로얄, 소울라이크, 로그라이크, 리니지라이크 등 유사게임이 우후죽순 출시되고 있다.
지난해 GOTY(Game of the Year) 수상작인 ‘엘든링’도 다크소울 시리즈의 오픈월드화에 가깝다. 완성도 높은 소울라이크 게임이었을 뿐, 독특함과는 거리가 멀다. 대한민국 RPG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로스트아크’는 어떨까. 핵 앤 슬래시(Hack & Slash)라는 흔한전투 방식에 다양한 콘텐츠를 집어넣은 MMORPG다. 잘 만들고, 잘 운영한 게임이지 참신한 게임은 역시 아니다.
그나마 위의 예시는 독창성은 부족해도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서 좋은 게임이다. 지난달 PC·모바일 크로스 플랫폼으로 출시한 ‘아키에이지 워’는 처음 플레이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리니지2M’을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무방한 게임이었다. 신작 MMORPG가 출시된다던 프로모션은 허위였다. 눈을 씻고 봐도 신작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란 거냐?’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이미 세상엔 무수히 다양한 게임들이 나와 있고,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는 한계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정말 그럴까. 창조적인 게임, 독창적인 세계관과 장르의 개척은 이제 불가능한 걸까.예술과 작품으로서의 게임을 기대해선 안되는 걸까.
지난해 하반기, 얼리액세스로 출시한 국내 게임 하나가 게이머들로부터 화제였다. 넥슨의 서브 브랜드 민트로켓에서 개발한 ‘데이브 더 다이버’다. 이 게임은 낮에는 해양 어드벤처, 저녁에는 식당을 경영하는 진행 방식이다. 그 두 가지 요소를 합쳐놓기만 했음에도 참신하고 좋다는 평을 받았다.
탱고 게임웍스 제작, 베데스다 배급.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개발자 본인들도 성공할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어떠한 정보 공개도, 사전 마케팅도 없이 출시됐다
‘3인칭 고양이 어드벤처’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스트레이(STRAY)'는, 길고양이의 시점으로 미래 도시를 탐험하는 게임이다. 3인칭 어드벤처 게임은 흔하지만,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고양이가 주인공인 게임은 흔치 않다. 지난 1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출시된 하이-파이 러시(Hi-Fi Rush)는 3인칭 액션 장르에 리듬 게임을 버무린 독창적인 작품이다. 색다른 시도와 조합이 찬사를 받아 메타크리틱 89점을 기록 중이다.
이렇듯, 새로움을 향한 시도와 갈망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그 시도의 주체가 중·소규모 게임사거나, 인디게임에 국한되고 있다. 대형 게임사들이 보여주는 흐름이, 예전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신작 리스크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뚜렷하다. ‘사이버펑크2077’의 실패가 그들에게 더 독이 되기라도 한 걸까.
위쳐3의 제작사 CD프로젝트(CDPR)가 2020년 하반기에 공개한 대형 오픈월드 RPG. 엄청난 기대 속에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미완성에 가까운 게임성,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버그, 처참한 최적화 등의 문제가 터져 너도나도 환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게이머들은 AAA급 게임의 예약구매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던 옛말이 지금에 와서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 새로움의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과거의 성공을 답습만 하면 그게 참된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을 발판삼아 꾸준히 시도했으면 좋겠다. 세상에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 필요까지도 없다. 여간해선 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만 기존의 것들을 독창적이게 조합하고, 재해석하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하다. 혁신을 주도한 애플이 내놓은 아이폰도, 기존에 있던 것들을 가져다 합쳐놓았을 뿐이다.
일전에 영화판에서 지금의 게임업계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작금의 일본 영화계가 몰락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는 변화가 적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안정적인 선택만 추구하다 보니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경향성이 만연해졌다. 독창적인 형태의 오리지널 영화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과거 아시아 영화판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화관에서 일본 영화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일본 영화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2019년도 박스오피스 순위. 외화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를 제외하면, 성공한 원작의 극장판·실사화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경향과 경기악화에 따른 불안이 문화 전반에 걸쳐 큰 타격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안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만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창조로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을까. 세계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바닥을 쳤던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규모 토목사업과 공공사업을 벌여 위기를 극복해냈다.더 이상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는 흐름이 지속된다면, 업계 전체가 불행해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