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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글렛 Apr 18. 2023

무법지대였던 우리 동네 오락실

오락실과 아케이드 게임에 관한 짧은 추억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에 오락실이 하나 생겼다. 내가 기억하는 오락실의 이미지는 불량배 같은 남자들로 들끓고, 담배냄새로 자욱하며, 시큼한 땀 냄새가 풍기고, 흔하게 욕설을 들을 수 있는 불건전한 공간이었다. 근처에 학교도 없어서 사복을 입은 출신을 알 수 없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은 인적이 드물었고 가게도 별로 없었다.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분리된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어린이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환호성과 기계음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코흘리개 어린이들이 동전 몇 개를 들고 가면, 여긴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라는 식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였고, 키가 두 뼘쯤 큰 형들에게 그나마 남은 잔돈마저 뺏기고 올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발길을 끊기 어려워서 공포와 재미를 동시에 느끼며 긴장감 속에 게임을 하곤 했다.

아케이드 게임 역사의 호황기를 장식한 대전 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87, 캡콤), 철권(94, 남코), 더 킹 오브 파이터즈(94, SNK), 버추어 파이터(93, 세가)

당시 오락실은 철권이나 스트리트 파이터, 더 킹 오브 파이터즈 같은 대전 격투게임이 붐이었다. 해당 게임기는 항상 사람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좀처럼 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어쩌다 자리가 나서 동전을 넣어본 적이 있다. 기술이란 게 뭔지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 버튼이나 두드리다가 상대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KO를 당했다. 주변에서 비웃음이 날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실력 차이에 주눅이 들어 한동안 얼씬도 하지 못했다. 격투게임은 내게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오락실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지만 모든 기계가 만석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이 꽤나 철저하게 갈렸는데, 격투를 소재로 한 게임은 대부분 자리가 찼던 반면, 슈팅게임이나 퀴즈, 퍼즐게임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어들(나보다 키가 크면 다 어른이었다)의 기세에 밀려 내가 선택했던 게임은 주로 ‘1943 미드웨이 해전’ 같은 슈팅게임이거나 스테이지형 게임 ‘버블보블’, ‘스노우 브라더스’,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 정도였다.

1943 (87, 캡콤. ‘1942’의 속편) 버블보블 (86, 타이토) 스노우 브라더스 (90년 토아플랜) 닌자 베이스볼 배트맨(93년 아이렘.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1943 미드웨이 해전(이하 1943)은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며 적기를 격추시키는 비행 슈팅게임이다. 어느 날 오락실에서 우연히 만난 삼촌이 하고 있었던 게임이다. 삼촌은 얼마간을 1943을 하기 위해 오락실에 자주 들락거렸다. 성인이었던 삼촌은 대전 격투게임에 손을 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게임 피지컬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슈팅게임을 했던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인기가 없던 게임이라 무한정으로 동전을 넣고 플레이 할 수 있었다. 삼촌이 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나 또한 빠지게 됐다.


퀴즈·퍼즐류 게임은 ‘틀린그림찾기’, ‘퀴즈 아카데미 6000’ 등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게임은 ‘테트리스’였다. 퍼즐게임계의 상징과도 같은 테트리스는 웬만하면 자리가 비어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끔 누가 앉아있으면 그 사람은 90%의 확률로 실력자였다. 기기에 입력된 하이스코어를 깨부수겠다는 듯이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몰두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손놀림 또한 현란했는데, 퍼즐게임이 격투게임만큼이나 컨트롤의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에 놀랐다. 똑같이 레버를 움직이고 버튼을 누르는 데도 테트리스 고수의 모습은 어쩐지 똑똑한 모범생의 작은 일탈처럼 보였다.

퀴즈 아카데미 6000(94, 선아전자) 틀린그림찾기 98 (98, 이오리스) 테트리스(84, 알렉세이 파지노프) 메탈슬러그 시리즈(96, SNK)

오락실에서 가장 많이 즐겼던 게임은 아마도 ‘메탈슬러그’다. 2D 도트 그래픽으로 엄청난 퀄리티를 보여줬던 메탈슬러그는 횡스크롤 전개 방식으로 스타일리시한 이펙트가 인상적인 게임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게임보다 난이도가 쉬웠고, 각 미션마다 보스가 존재하는 스토리 진행 방식이라는 점에서 도전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오락실의 터줏대감들은 출시와 동시에 엔딩을 본 뒤 그 과정을 반복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인기몰이를 거치고 나자 대체로 빈자리인 상태였다. 여러모로 접근이 쉬운 게임이었다.


이밖에도 많은 게임이 있었는데, 이따금씩 재밌게 했지만 도무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게임도 있고, 오락실을 떠나기 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게임도 있다. 격투게임 만큼이나 오락실 소음의 한 축을 담당했던 ‘DDR(댄스 댄스 레볼루션)’, 고수들의 현란한 플레이가 돋보였던 ‘비트 매니아’도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소재다. 오락실은 어지러울 만큼 요란하고 환상적으로 빠져드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방의 작은 마을에 뒤늦게 나타난 오락실의 역사는 너무도 짧았다.

댄스 댄스 레볼루션(DDR)(98, 코나미) 비트 매니아(97, 코나미)

동네 남자들의 아지트였던 오락실은 정말 한 순간에 사라졌다. 고가도로 아래 오픈한 PC방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문을 닫은 이후엔 카센터로 바뀌었다. 남자들의 본거지는 PC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연령에 제한이 없었던 오락실과는 달리, PC방은 초등학교 저학년에겐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우리 동네만 그랬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고 추억삼아 다시 찾은 오락실은 한산했다. 무법지대같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판에 100원이었던 게임은 이제 500원을 넣어야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주던 기쁨을 떠올리니 유감스러웠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다 쓸 각오로 갔지만 얼마 쓰지 못했다. 텅텅 비어있는 기판 앞 원형 의자들을 바라보다 괜히 외로워져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재야의 고수를 만나 게임 좀 배워볼까 싶었는데, 오는 손님은 죄다 옆쪽 코인노래방으로 향했다.


아케이드 게임의 시대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하고 흘려보낸 게 아쉽다. 이제는 뛰어난 그래픽의 다양한 비디오 게임들이 출시되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됐다. 한때 문화와 유흥에 파란을 일으켰던 아케이드 게임은 마니아들의 전유물이 됐다.

하이스코어 걸(오락실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러브 코미디 작품. 넷플릭스로 공개됐으나, 저작권 문제로 한국 넷플릭스에선 아직 볼 수 없다)

나처럼 그때를 추억하고 싶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스코어 걸’을 시청해보길 바란다. 아케이드 게임 덕후인 남학생이 우연히 오락실에서 격투게임 고수인 여학생을 만나 이뤄지는 순정물이다. 1990년대 일본 오락실의 발전과 역사, 아케이드 게임의 호황기를 리얼하게 묘사했다. 게임을 좋아하는(특히 아케이드 게임)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다가올 이야기다. 일본이 배경이지만 우리나라와도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있어, 오락실을 주제로 한 검정고무신을 보는 것 같은 아련한 감상을 느낄 수 있다.


함께 참고할만한 책으로 이시이 젠지 작가의 ‘나의 오락실 이야기’를 추천한다. 1972년부터 2017년까지 일본의 오락실 문화, 게임의 역사 전체를 훑을 수 있다.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이기에 내용과 자료가 풍성하다. 우리나라 서적으로는 꿀딴지곰 작가의 ‘레트로 게임 대백과’가 있다. 추억의 고전 게임이 그리울 때면 한번 씩 펼쳐보기 좋다.​

나의 오락실 이야기(이시이 젠지), 레트로 게임 대백과(꿀딴지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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