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2-1.
회의실.
스크린에 빼곡히 들어찬 차트와 그래프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화면의 한쪽이 텅 빈 듯 허옇게 보였다.
눈을 비비고, 안경을 벗어 닦아 다시 써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저기, 저 숫자 좀 보여?” 옆자리 동료에게 물었을 때, 동료는 멀쩡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이는데 왜?”
그는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내가 잠시 눈이 피곤한 거구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대충 넘겼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이상한 불길함으로 점점 얼어붙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식당에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다 자꾸 허공만 잡았다. 휴대폰 메시지를 읽는데 어떤 단어는 자꾸 빠져나간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가도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앞 좀 보고 다니세요!” 상대방이 불쾌하게 내뱉고 지나갔지만, 그는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충혈도, 특별한 이상도 없어 보였다.
“요즘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속삭였다. ‘컴퓨터를 너무 오래 봤으니까, 노안이 시작된 거니까.’ 그럴싸한 이유를 하나둘 붙여가며 불안을 눌러 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더 조여왔다.
저녁, 아이 숙제를 보던 중이었다. 공책 위에 쓰인 글씨가 유난히 희미하게 번져 보였다.
“아빠, 여기 뭐라고 써 있어?” 아이가 물었을 때, 그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 글자가 도무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에 맺혔다. “아빠 눈이 좀 피곤하네.”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던 아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안과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툭 던진 말투였지만, 그 한마디가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대꾸하지 못한 채 공책을 덮어버렸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웠을 때, 천장은 어둡고 낯설게 보였다. 한쪽 시야에 먹물이 번지듯 어둠이 내려앉는 착각이 들었다.
‘설마… 실명하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럴 리 없어. 그냥 피곤한 거야.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는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 너머에도 먹구름 같은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2-2.
아침. 주차장 기둥에 붙은 출입 표지판의 글자가 미묘하게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 하얀 바탕 위 검은 활자 ‘B2 →’의 화살표가 물속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떨렸다. 그는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 초점을 맞춰 보았다. 그러면 잠깐 또렷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끝에서 햇빛이 한 번에 들이치자, 시야가 번쩍하며 하얗게 세탁된 것처럼 탈색됐다. 순간 브레이크에 발이 더 세게 올라갔다. 뒤차가 짧게 경적을 울렸다. 그는 백미러로 사과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작은 동작에도 손끝에서 땀이 났다.
출근길은 늘 가던 대로였다. 라디오에서 부동산 코너가 흘러나왔다. “학군, 재건축, 전세가 지수—” 앵커의 발음이 칼로 선을 긋듯 귀를 스쳤다. ‘아껴야 강남으로 간다’던 아내의 말이 라디오 속 해설자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그 겹침이 마치 귀 뒤에서 누군가 자꾸 귓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거슬렸다.
사무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어젯밤보다 더 퀭했다. 눈 밑의 그늘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잠을 못 자서 그렇지.’ 속으로 변명했다. 문이 열리자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뻗쳤다. 그 빛이 오늘따라 너무 날카롭게 느껴졌다.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민사 소장 초고를 열고 문단 정리를 하려는데, 문장 중간에 숫자 하나가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③ 다음에 ④가 오지 않고 ⑥이 바로 붙어 있는 느낌—그러나 스크롤을 올리고 내려도 실제로는 제대로 적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만 어떤 부분이 계속 빠졌다가 나타났다.
프린터에서 뽑아온 계약서를 읽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강 훑는 버릇을 발동했다. 그런데 훑다가 놓친 줄이 한둘이 아니었다. 형광펜을 들고 표시하려다, 거의 매 줄마다 멈추게 되었다. 글자가 뭉개지는 부분, 오른쪽 여백으로 시선이 툭 빠져나가 버리는 부분, 문단이 갑자기 비어 보이는 착시. ‘이건 그냥 피곤해서 집중이 안 되는 거야.’ 습관처럼 결론을 내리고, 억지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점심 무렵, 팀 동료가 옆자리로 다가와 “오늘 법원 가시죠?” 하고 물었다. 그는 “아, 네. 오후에요.”라고 대답했지만, 스케줄러를 확인하는 손이 잠시 멈췄다. 일정표의 시간 칸이 희미하게 씻겨 내려가듯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또렷해지는데, 시선을 잠깐만 다른 데로 돌리면 다시 번졌다.
식당으로 내려가다 계단 끝에서 발끝이 공중을 헛짚었다. 몸이 앞으로 기울면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 커피가 계단 모서리에 탁— 하고 부딪쳐 갈색 무늬를 흩뿌렸다. “괜찮으세요?” 누가 물었다. 그는 “네, 네.” 하며 허리를 폈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은 자리를 손으로 더듬게 되었다. 계단 모서리의 노란 미끄럼 방지 테이프가 한쪽에서만 반쯤 잘려 보였다.
식당에서 자리에 앉자, 접시에 담긴 제육볶음이 섞여 있는 채소와 한 덩어리로 보였다가, 포크끝을 가져가면 갑자기 그 덩어리가 둘로 나뉘었다. “오늘 좀 피곤해 보이시네.” 맞은편 동료가 말했다. 그는 “어제 잠을 좀 못 잤어요.”라고 대답했다. 평범한 농담 몇 마디가 오갔다. 동료가 웃을 때 치아가 번쩍 빛났는데, 그 반짝임이 유난히 눈을 찌르는 듯했다.
오후 법원 복도는 늘 그렇듯 사람들로 붐볐다. 원고석, 피고석, 방청석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뒤엉켜 울렸다. 그는 재판정 앞 의자에 앉아 메모를 정리했다. 펜 끝이 종이를 누르는데, 글씨가 일정하게 써지지 않았다.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쏠렸다. 노트 가장자리에 쓰인 날짜가 반쯤 잘려 보였다. 마치 누군가 오른쪽에서 얇은 칼로 시야 조각을 잘라내는 기분.
짧은 변론이 끝나고 복도로 나오는데, 누군가와 어깨가 세게 부딪혔다. “앞 좀 보고 다니세요.” 낮게 성난 목소리. 그는 얼른 사과했지만, 마음속에는 미묘한 모욕감과 공포가 동시에 뭉쳤다. ‘앞을 보고 있는데도, 앞이 잘 안 보여.’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발화했다.
해 질 무렵,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호등이 노란색인지 초록색인지 잠깐 구분이 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다시 뗐다가, 뒤차의 경적을 또 받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마디가 흰색으로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갔다. 그는 길가 휴게 공간에 차를 세웠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이제는 아니다. 더는 미루면 안 된다.’
편의점에 들러 우유를 사오라는 아내의 메시지가 떴다. 문자 알림창의 글자가 얼룩처럼 뭉개졌다. 화면을 확대하니 또렷해졌지만, 손을 떼자 다시 작아지고 흐려졌다. 편의점 냉장고 앞에 서서 우유 팩을 고르는데, 유통기한 숫자 중 ‘8’과 ‘3’이 서로 엇갈려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나하나 더듬어 읽었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며, 속으로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실수하면 아내의 잔소리가 돌아올 것이다—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정말로 내가 잘못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아이들은 방에서 과제 중이었다. 딸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 우유 샀어?”
“응.”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웃다가, 그의 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아빠가 오늘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구나.
거실로 들어가자 아내는 영수증을 펼쳐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유 가격 또 올랐네.”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소파 등받이에 조용히 앉았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저녁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그 빛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걸, 그는 또렷이 느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병원 앱을 열었다. 대학병원 안과—예약 가능한 날짜가 달력에 점으로 표시됐다. 화면을 확대하고,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했다가, 다시 왼쪽으로 당겼다. 작은 점들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엄지와 검지가 화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날짜를 탭하려는데, 손끝이 자꾸 옆칸을 건드렸다. 세 번째 시도 만에 원하는 날짜가 선택되었다. 시간대를 고르는 창에서 그는 잠깐 멈췄다.
‘내일로 할까, 모레로 할까.’
내일이면 곧 알게 될 것이고, 모레면 하루 더 미룰 수 있다. 미룬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어이없는 저울질을 했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일.’
예약을 확정하는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떴다. 그 문장은—이상하게도—그를 잠깐 안정시켰다. 결론을 미루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아주 짧은 순간의 정적. 그러나 그 정적 뒤로 곧장 다른 파문이 따라왔다. 진짜 결과가 오면, 무엇을 잃게 될까. 아니, 무엇을 얻게 될까.
부엌에서 설거지 물소리가 났다. 아내는 등을 보인 채 그릇을 헹구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말을 꺼낼까 하다가 멈췄다. “내일 병원 가.”라고 말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걱정하는 표정일까, 비용을 먼저 묻는 목소리일까. 머릿속에서 여러 버전의 대화가 빠르게 재생되다, 그는 결국 입을 닫았다. 오늘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거실 불을 끄고 소파에 길게 기대자, 창밖 가로등이 켜졌다. 불빛이 켜지는 순간—딱,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 오른쪽이 아주 잠깐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시야의 일부만 껐다 켜는 것처럼. 그는 그 기괴한 감각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이 방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빠, 내일 체육대회 연습 있어.” 딸의 목소리였다.
“그래, 운동화 끈 단단히 묶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 목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러 나갔다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실제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날 밤, 그는 알람을 두 개 맞췄다. 하나는 아침 6시, 다른 하나는 6시 5분. 화면 밝기를 낮추고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하얀 사각형이 서서히 어둠에 잠겼다. 오른쪽 모서리가 먼저 지워지고, 그 다음이 가운데, 마지막이 왼쪽—그 순서를 그는 어림잡아 기억했다.
눈을 감기 전, 예약 확인 메시지를 다시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숫자 ‘09:40’이 한 번은 두 겹으로, 한 번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적어도 이름을 알게 되겠지. 내가 겪고 있는 것의 이름.’
그 생각이—묘하게도—그를 조금 가볍게 했다. 아주 조금. 그는 그 ‘조금’을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집안은 조용했고, 멀리서 냉장고 모터가 켜졌다 꺼졌다. 그 사이사이에, 그의 심장 소리가 규칙을 찾으려 애쓰는 듯했다.
2-3.
병원 대기실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소독약과 약간의 먼지 섞인 공기의 조합은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접수창구에서 받은 번호표를 손에 꼭 쥔 채, 차례를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의 기침 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 차갑게 울리는 안내 방송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별일 아니겠지.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번호가 불리자 그는 마치 재판정에 불려가는 피고처럼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료실 문을 열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증상이 있어 오셨어요?”
의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백한 태도조차 그의 불안을 더 크게 증폭시켰다. 그는 차근차근 말을 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더듬거리며 쏟아냈다.
“그… 시야가, 이상해요. 한쪽이 가끔 허옇게 가려지고,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고… 젓가락질도 자꾸 허공을 짚고… 네, 며칠 전부터 계속 이래서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기본 검사를 진행했다. 시력표를 바라보게 했고, 불빛을 비추며 동공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정밀검사가 필요하겠습니다. 바로 MRI 찍고 오시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위장이 움켜쥐어진 듯 움츠러들었다. ‘MRI라니, 그냥 단순한 노안이 아니란 말인가?’
검사실의 기계음은 차갑고 비현실적이었다. 거대한 원형 장비 속으로 몸이 천천히 들어가자, 마치 다른 세계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쿵, 쿵’ 울리는 기계음 속에서,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잡생각이 밀려들었다. ‘혹시 뇌에 뭐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시신경이 손상된 건가? 설마…’
검사가 끝나고 다시 진료실에 앉았을 때, 의사의 표정은 처음보다 조금 무거워져 있었다. 모니터에 떠 있는 MRI 이미지를 보며 의사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혹시 가족 중에 암 진단을 받은 분 계십니까?”
그 순간 그는 귀가 멍해졌다. 단어는 분명히 들렸지만, 의미가 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입술이 마르면서 목 안쪽이 바싹 붙어버렸다.
“암… 이라고요?”
“네. 뇌의 특정 부위에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크기로 보아 꽤 진행된 상태로 보입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바로 앞에서 의사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단어는 멀리서 메아리치듯 희미하게 울릴 뿐이었다. ‘수술, 항암치료, 경과, 시야 손상…’ 몇 개의 단어만 뚝뚝 끊겨 들어왔다.
손끝이 떨려서 무릎 위에 올린 손이 가만있질 못했다. 의사가 건네는 자료를 받아들고도 한참 동안 펼쳐보지 못했다.
‘암이라니. 나한테, 지금? 왜 하필…’
심장이 쿵쾅거리며 속에서 무언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게도 아주 미묘한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회사 보고서, 성과 압박, 체면, 대출, 강남 이사… 그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아주 멀리 밀려나 버렸다.
의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더 정밀한 조직검사와 추가 검사가 필요합니다. 치료 방향은 그 결과를 보고 정하셔야 할 겁니다.”
그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 마치 세상이 낯설게 뒤틀린 것 같았다. 복도 벽의 색깔조차 이전보다 탁하게 보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이제… 이제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2-4.
집으로 돌아온 그는 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거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 책가방이 한쪽에 널브러져 있고, 부엌에서는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는 듯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소리가 유리벽 너머에서 들리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처음에는 부정이었다. “잘못 본 거겠지.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야.” 그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교모세포종 오진 사례’를 검색했다. 하지만 화면에 뜨는 것은 잔혹한 수치와 통계뿐이었다. 생존율 그래프, 환자 후기, 의료진의 냉정한 문구들이 눈에 박혔다. 글자가 번져 보이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다음은 분노였다.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축 늘어진 어깨, 힘 빠진 눈빛. 주먹을 꽉 쥐고 거울을 치려다 멈췄다. “왜 하필 나야. 왜 지금이야.” 속으로 웅얼거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협상 비슷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수술하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항암치료, 방사선, 뭐든 하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겠지.’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당장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의사는 이미 다음 외래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때 직접 물어보자.” 스스로를 달래며 핸드폰을 뒤집어 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이 몰려왔다. 그는 며칠 동안 소파에만 붙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내의 잔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릴 뿐,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이미 이 집에서 투명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늦가을의 공원에 나가 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사이로 노인이 비둘기들에게 빵 조각을 던지고 있었다. 비둘기들은 천천히 모여들었다가 또 흩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다 똑같지. 언젠가는 누구나 떠나는 거지. 나는 단지 조금 먼저 알게 된 거구나.”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내의 메시지였다.
“오늘도 늦어? 우유 사 와.”
그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속에 묘한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체면, 눈치, 기대 따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