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에 스미는 그림자

1막

by 광수


1-1.

아내는 이미 나가 있었다. 싱크대 옆 머그컵 자국과 식탁 위에 뒤집힌 교사용 네임택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부엌등을 켜자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그는 토스트기를 콘센트에 꽂고 식빵 두 장을 밀어 넣었다. 토스터에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팬을 달구고 달걀을 깨 넣자, 노른자가 중앙에서 천천히 퍼졌다.


아들은 먼저 식탁에 와서 앉았다. 스마트폰 화면이 그의 얼굴에 희미한 빛을 올렸다. 뉴스 클립이 자동으로 넘어가고, 알림 소리가 진동으로만 짧게 떨렸다. 그는 숟가락도 없이 포크로 달걀을 찍어 입에 넣었다. 얼굴 근육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끝까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딸은 발뒤꿈치를 톡톡 바닥에 찍으며 의자에 앉았다. 토스트를 한 모서리부터 아주 작게 뜯었다. 입에 넣고 씹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자꾸 아빠 얼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다음 식탁 가장자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케첩 있어?” 작은 목소리. 그는 냉장고를 열어 한 병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개가 오래된 습관처럼 한 번에 풀렸다.


창밖에 잎사귀가 덜 떨어진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 몇 장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음이 바닥을 통해 낮게 전해졌다. 그는 달걀을 접시에 옮기고 토스트를 반으로 잘랐다. 버터가 금세 표면에서 녹아, 얇게 번져나갔다.


“우유?” 그가 물었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컵에 우유를 따르다가, 컵 가장자리에 작은 물결이 서는 것을 잠깐 바라봤다. 잠에서 덜 깨서 컵을 저 정도만 잡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입안에서 작게 “응” 하고 말했다. 화면 속 앵커가 ‘오늘의 법정 소식’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아들은 볼륨을 낮췄다. 무심하게 내린 손가락이 이어폰 없이 소리가 번지는 걸 본능처럼 막았다. 그는 그 동작이 낯익다고 느꼈다. 시끄러움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줄이는 몸의 습관.


딸의 접시 가장자리엔 케첩이 묻어 붉은 점이 번졌다. 그녀는 습관처럼 손가락 끝으로 그 자국을 찍더니, 지우개처럼 접시에 문질러 희미하게 번져버렸다. 차가운 유리 식탁 위로 그녀의 숨이 옅은 김을 남겼다. 그는 그 행동을 지적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끝내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체육 있어?” 그가 물었다.


딸이 토스트를 삼키고 작게 말했다. “있어요. 오래달리기.”

“그럼 운동화 끈 단단히 묶고.”

“네.”


아들은 화면을 끄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먼저 간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잘 다녀와.”


아들은 현관으로 가면서 신발장 거울을 스치듯 보고, 신발 끈을 한 번에 당겼다. 그 끈이 신발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깔끔하게 눌러 넣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문이 ‘탁’ 하고 닫히고 나서야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더 가벼워졌다.


딸은 남은 우유를 한 번에 마시지 않았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 모금씩 간격을 두고 마셨다. 마실 때마다 그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봤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고, 그냥 확인하려는 눈빛 같았다. 그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괜찮다, 라는 뜻으로.


“다 먹었어요.” 딸이 컵을 내려놓았다.

“집에 돌아오면 수학 숙제 보여줘.”

“알겠어요.”


그가 가방을 건네주자, 딸은 어깨에 멘 끈을 자신의 체격에 맞게 한 칸 더 줄였다. 작은 체구가 가방에 반쯤 묻혔다. 그는 손을 들어 가방 어깨끈을 한 번 펴주고, 뒤돌아선 딸의 머리끈이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학교 잘 다녀와.”


“네.” 그녀는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자, 주방의 소리들이 갑자기 크게 들렸다. 팬 위에서 식지 않은 기름이 아주 미세하게 ‘츳’ 하는 소리를 냈다. 식탁 위 컵에 남은 우유막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는 빈 의자 두 개를 번갈아 보다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식탁 유리 아래 깔린 프린트 무늬가 선명한데도, 머릿속은 길게 빛이 빠진 화면 같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접시 모서리를 한 번 쓸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아 쓰레기통에 털었다. 싱크대 수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스테인리스 표면에 얇은 선을 만들다 곧 사라졌다. 창밖 은행잎 몇 장이 더 떨어졌다. 낙엽이 바닥에 닿기 전, 잠깐 둥글게 돌아서 떨어지는 순간을 그는 오래 보았다. 금방 잊을 장면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 켜진 불빛이 주방 가구의 모서리를 정직하게 드러냈다. 그 정직함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는 출근 준비를 하며, 잠시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서 오래전에 접어 넣어둔 작은 메모가 하나 나왔다. ‘무료 법률상담의 밤—아이디어’라는 제목이 상단에 적혀 있었다. 날짜는 흐릿했다. 그는 메모를 다시 접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


현관에 서서 신발을 신다가, 그는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빈 의자 두 개, 식탁 위에 엎어둔 컵, 식빵 부스러기가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접시. 그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뺐다. “늦지 않게 오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문을 열었다.


복도의 공기가 차가웠다. 문이 닫히며 실내의 온기가 멀어졌다.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쪽에 설치된 좁은 거울 속에서 그의 얼굴이 잠깐 흔들렸다. 그는 그 흔들림이 엘리베이터의 진동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를 판단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판단하지 않는 쪽이 오늘 아침엔 더 쉬웠다.


1-2.

차 시동을 걸자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졌다. 앵커의 목소리가 기계처럼 또렷했다.

“오늘의 법정 소식입니다. ○○구 재개발 조합 비리 사건, 1심 선고 결과—”


그는 버튼을 눌러 볼륨을 낮췄다. 남은 소리는 바깥 도로의 경적, 신호 대기하는 차들의 엔진 진동, 횡단보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무리지어 건너는 발소리였다.


차창 너머로 고등학생 무리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게 보였다. 책가방이 덜컹거리고, 신발 끈이 풀린 채 뛰는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웠다. 그는 잠시 그 아이들을 눈으로 좇다가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법원에는 한 무더기의 사건 기록이 쌓여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재산을 두고 싸우고, 누군가는 이혼 협의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사건마다 이름과 표정이 다르지만, 결과는 늘 비슷했다. 돈. 집. 남은 것과 잃은 것.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뢰인의 얼굴이 흘러갔지만, 그중 누구의 눈빛도 선명하게 남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자, 옆 차선 SUV 안에서 젊은 부부가 보였다. 남편이 커피를 건네주자 아내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그 웃음이 창문 너머까지 번져 들어왔다. 그는 시선을 돌렸지만,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따라왔다. 무표정, 굳은 입꼬리, 깊어진 눈가 주름.


그 순간, 오래된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대학 시절, 한겨울 저녁. 낡은 강의실. 전기히터 하나로는 추위를 버티기 어려웠지만, 법학과 동기들은 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커피 자판기 종이컵에서 김이 올라왔고, 그 옆에서 친구가 노트에 뭔가를 휘갈겨 쓰더니 그에게 보여주었다.


시민을 위한 법, 따뜻한 변호사.


그는 소리 내어 읽고 웃었다.

“그래, 우리 그렇게 되자. 돈이 아니라, 사람을 지켜주는 변호사.”

그때는 진심이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밤새 토론하고, 작은 상담소를 열어보자며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 그는 급히 핸들을 꺾어 차를 몰았다. 차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머릿속엔 그 낡은 노트에 적힌 글씨체가 선명하게 남았다.


도로 옆 가로수에 바람이 불어 낙엽이 허공에서 빙글 돌았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순간 시야가 뿌옇게 흔들렸다. 그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마에 힘을 주어 다시 앞을 보았지만, 어딘가 초점이 늦게 맞춰지는 듯했다.


그는 창문을 조금 내리고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바람이 머리를 식히는 대신, 오히려 기억을 더 또렷하게 불러냈다.


시민을 위한 법.

그 문장이 한동안 귓가에 메아리쳤다.


1-3.

현관을 열자, 집 안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고지서와 영수증이 널브러져 있었고, 계산기가 그 옆에서 벌써 전투를 치른 흔적처럼 삐걱거렸다. 아내는 안경을 반쯤 코끝에 걸친 채 숫자를 적고 있었다. 그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었다.


“오늘 관리비 고지서 봤어?”


그는 넥타이를 풀며 신발을 벗었다. “자동이체로 빠졌을 거야.”


“그걸 확인은 했어? 지난번에도 빠져나간 줄 알았다가 내가 두 번이나 챙겼잖아. 이번 달도 분명히 늦게 내면 연체료 붙을 걸.”


대꾸하지 않고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이런 식의 대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재생되는 레코드판 같았다.


아내는 갑자기 세면대 옆에 놓아둔 바디워시를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내려놨다. “이거 새로 샀어? 얼마 주고?”


“마트에서 할인하길래… 몇 천 원 차이밖에 안 나.”


“그 몇 천 원이 모여 몇 만 원, 몇 십만 원이 되는 거야. 그렇게 흘려 쓰니까 평생 이 집에서 못 벗어나지.”


그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도 이미 자리에 있었다.


아들은 포크를 쥔 손으로 밥을 서둘러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지만, 옆에 스마트폰을 놓아둔 채 언제든 도망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다. 씹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밥알이 목구멍을 막는 소리가 거칠게 들릴 정도였다.


딸은 젓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젓가락 끝이 그릇에 부딪힐까 봐 매번 공기 중에서 멈칫한 뒤 살짝 내려놓았다. 아빠와 엄마의 대화를 번갈아 보면서 숨을 얇게 고르고 있었다.


“우린 수입이 부족한 편은 아니잖아.”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아내가 눈을 번쩍이며 그를 바라봤다. 안경테 너머로 눈동자가 피곤하게 빛났다.

“그래서 평생 여기서만 살 거야? 아껴야 강남으로 갈 수 있지. 애들 학교 문제 생각 안 해?”


그는 잠시 멈췄다. 대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대답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딸깍, 딸깍, 숫자가 쌓이는 소리.

“관리비, 대출 이자, 학원비, 교통비…. 매달 고정 지출만 이만큼이야. 이 와중에 바디워시 같은 데 돈을 흘리면, 언제 강남으로 가겠어.”


그는 식탁 위의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밥맛은 입안에서 흩어졌지만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는 계산기를 치던 손을 멈추더니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스친 표정은 지쳐 보였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만 이렇게 계산하고 살아야 하냐고. 당신은 그냥 벌어다 주고 끝이지? 현실은 내가 다 맞대고 있어.”


아들은 그 순간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다 먹었어요.” 목소리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눌러 담겨 있었다.

“천천히 먹어.” 아내가 말했지만, 아들은 이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딸은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엄마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밥알을 하나씩 집어 삼켰다. 젓가락이 그릇에 닿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너무 커 보였다.


그는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알 몇 개가 흩어져 그릇 가장자리에 붙었다. 그는 불빛에 비친 그것들을 오래 바라봤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 바람이 세게 불자 베란다 창문이 덜컹거렸다. 아내는 다시 계산기를 들었다. 숫자가 눌릴 때마다 ‘딸깍, 딸깍’ 하는 소리가 집 안의 공기를 더 압축하는 듯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돌고 돌아 또다시 돈, 또다시 집, 또다시 강남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걸, 그는 이미 수없이 경험해왔기 때문이었다.


1-4.

아침의 부산스러움이 가라앉자, 거실은 금세 텅 빈 듯한 정적에 잠긴다. 식탁 위에는 아이들이 흘리고 간 시리얼 부스러기, 아내가 허둥지둥 챙기다 남겨둔 김밥 조각, 반쯤 비워진 우유컵이 그대로 놓여 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현관문을 나서며 자동으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지만, 아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 발자국 소리가 아파트 복도에 공허하게 울린다.


엘리베이터 안, 벽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옆머리에는 은근히 늘어난 흰 머리가 비집고 나온다. 넥타이는 반듯하게 매었지만, 얼굴은 무표정하다. 순간,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내가 맞나?" 하는 짧은 의문이 스쳐 지나간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서면,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차들이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라디오 버튼을 누르자 기계음처럼 반복되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온다. 국제 정세, 경제 동향, 강남 집값 이야기.


‘아껴야 강남으로 갈 수 있다.’

조금 전 아내의 말이 되살아난다. 그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에 괜히 힘을 주며 중얼거린다.

“부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까지…”

그러나 이내 목구멍에서 말이 끊긴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부동산 해설자의 말이, 아내의 목소리와 섞여 하나의 잔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도로에 들어서면, 차들이 줄지어 천천히 흘러간다. 붉은 브레이크등이 반복적으로 켜졌다 꺼졌다를 이어간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초등학생 무리는 가방이 더 커 보일 정도로 작고 앳되다. 출근길 직장인들은 종이컵 커피를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간다.


그는 신호에 걸려 멈춘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맞은편 인도에서 어떤 남자가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있다. 아이는 한 손에 작은 풍선을 들고 있다.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다. "나는 언제 저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있었나."


라디오 진행자가 밝은 목소리로 오늘의 날씨를 전한다. 하늘은 맑고, 대기질도 양호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보는 창밖의 하늘은 오히려 눈부시게 환한 빛 때문에 더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그는 괜히 창문을 살짝 내려 바람을 맞아 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스치지만, 머릿속은 답답하게 막혀 있다. 어제도 이 길이었고, 내일도 이 길일 것이다. 같은 길, 같은 뉴스, 같은 생각. 그 단조로운 되풀이가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1-5.

회색빛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주차장에 들어선다. 회사 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계적으로 일정하다.


엘리베이터 안, 동료 몇 명과 함께 섰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대신 짧고 형식적인 인사가 공기를 스친다.

“어제 야구 보셨어요?”

“어… 예.”

그는 대답은 하지만, 실제로는 경기 내용을 모른다. 흘려듣는 뉴스에서 얼핏 들었던 단어 몇 개로 대충 맞장구를 친다. 상대방도 그의 무관심을 알아채지만 굳이 더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사무실 문을 열면, 형광등 불빛이 머리 위에서 환하게 쏟아진다. 모니터 켜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프린터에서 종이가 뽑히는 소리가 섞여 하나의 단조로운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온다.


자리에 앉은 그는 컴퓨터를 켜고 자동 로그인되는 업무 프로그램을 띄운다. 반복되는 보고서, 수치 입력, 확인 버튼. 손가락은 익숙하게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공허하다.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걸 누가 제대로 읽기나 할까.’


가끔 팀장이 지나가며 묻는다.

“그건 진행 잘 되고 있지?”

“네, 곧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대답은 기계적이고, 팀장도 더 캐묻지 않는다. 상사의 목소리도 라디오 뉴스처럼 귀를 스쳐 지나간다.


점심 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식당으로 향한다. 메뉴는 매일 비슷하다. 김치찌개, 제육볶음, 된장찌개가 번갈아 나온다. 식탁에 앉아도 대화는 그저 날씨 이야기, 주식 이야기, 아이 학원 이야기 같은 피상적인 잡담뿐이다.

“요즘 집값이 좀 오르는 것 같던데…”

그 말이 들리자 아내의 목소리가 겹쳐 떠오른다. “아껴야 강남으로 간다니까.”

그는 숟가락을 잠시 멈추고 허공을 본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후가 되면 졸음이 몰려오고, 회의실로 들어가면 빔프로젝터 화면이 희뿌옇게 벽에 비친다. 누군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지만, 말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창밖으로 스치는 햇빛이 눈을 찌른다.


회의 말미에 상사가 “질문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흐른 뒤, “그럼 이 정도로 마치죠.”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속으로 되뇐다.

‘오늘도 똑같네. 어제랑 다를 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