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답사가 한창일 때 직원 중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 재단이 야심 차게 기획해온 '복합문화교육센터' 개관. '옛 고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시민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가득했던 이곳은 여름인데도 제법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주변 곳곳에 자리한 무당집들과 자리를 깔고 누운 들개 무리, 가게 문 닫은 지 십수 년 쯤 됐을법한 인근 상가등이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내부는 괜찮겠죠?"
"먼저 와본 선배 표정보니까 아니던데"
"에이~ 괜찮을 거예요."
괜찮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두기라도 했는지 4층 복도 바닥에는 날벌레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지뢰 피하듯 종종걸음으로 걸어나가 창고로 문서를 옮기고 나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건장한 성인 남녀 셋이 테이블에 기절할 듯 엎어졌다. 힘들다. 이 고생을 해서라도 사무실을 이전하고 싶냐고 물으면 물론 "예스"다. 이제는 우리 팀의 단독 사무공간이 생길 예정이었으며 내 등 뒤를 케비닛이 지켜줄 예정이었다. 직장인에게 이보다 좋은 근무환경이 어디 있겠는가. 휑하던 내 뒷자리여 안녕이다.
사무실 터가 안 좋은 것 같다던 추측은 재단에 도둑이 든 후로 신빙성이 더해지는듯하더니 금세 사그라졌다. 도둑은 금방 검거되었고 그가 먹어치운 피자 몇 조각 외의 모든 물품이 회수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직원들은 이벤트에 내성이 생겼는지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일희일비하기에는 너무나 바빴던 탓이다.
사무실 이전 후로는 모든 일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그림책 프리비엔날레 개최식과 복합문화센터 개관식이 하루 간격으로 있었다. 이 맘쯤에는 모든 직원이 반쯤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나는 오랜만에 하나님을 찾았다. 가끔 부처님도 찾고 조상신도 찾았다. 어느 정도로 중증이었냐면 그림책 전시를 보러 가자마자 '내가 이 시설 계약을 잘 했던가?'라는 생각에 온몸의 피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고 그 뒤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사무실로 복귀해야 했다. 같이 전시를 보러 갔던 입사 동기가 나중에 말하길, 갑자기 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걱정했다고.
막무가내로 계약을 해달라는 사업담당자들에게 원망과 묘한 동질감을 섞어 가지며, 가끔 채용공고를 뒤적거리고 머리를 쥐어싸매다가, 끝내 퇴사하는 직원들을 붙잡고 아쉬운 마음을 토해내며, 그렇게 여름에서 겨울이 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림책프리비엔날레> 일부 현장
연도가 바뀌고 이제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남아있다. 몇 억 원어치 산 물품들의 라벨을 아직 다 붙이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종종거리며 건물들을 쏘다닌다. 나는 홀로 업무를 할 때 약간의 상황극을 연출하는 버릇이 있는데, 물품에 자산 라벨을 붙일 때는 주로 대출 업체 직원이 되어 가압류 빨간 딱지를 붙이는 상상을 했다. '대표님, 이 건물들은 이제 제 것입니다.'라고 터무니없는 혼잣말을 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새삼 첫인상에 비해 확연히 좋아진 센터의 모습이 눈에 띈다. 한동안 친한 직원들과 "조달청의 냄새가 난다"라던가 "역시 메이드 인 공공기관"이라는 농담을 주고받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이 무색하게 보일 지경이다. 이렇게 번듯하게 리모델링을 해놨는데 발걸음이 뜸하다니 어딘가 아쉽기도 하다.
볕드는 2층 로비
나중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복합문화교육센터를 방문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밀려드는 인파에 짜증이 치밀 정도로. 아이들이 1층 카페 옆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주부들이 도란도란 커피를 한 잔 했으면. 오후에는 견주들이 남산근린공원에서 내려와 반려견과 산책을 했으면. 예술가들이 레지던시 공간 때문에 궁핍할 일 없이 본인의 창작물을 실현할 수 있었으면. 노랫소리가 가끔은 귀에 거슬리는 그런 곳이었으 면. 나 한 명의 발걸음만이 뽀득거리는 운동장에서 그런 미래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