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베러맨 > 시사회에 다녀와서
“영국 국민가수” 로비 윌리엄스의 대표 수식어다. 영국 최고의 대중음악 시상식 브릿 어워드(Brit Award)에서 올해의 영국 남자 음악인(British Male Solo Artist)을 4차례나 수상하며 그야말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제패한 로비는 짓궂지만 섹시한 악동 캐릭터와 히트곡 고공행진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종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The Greatest Entertainer)”이라고 불릴 만큼 무대 장악력이 출중했다.
로비 본인의 닉네임같은 휴 잭맨 주연의 영화 < 위대한 쇼맨 >(2017)의 연출가 마이클 그레이시가 연출한 2024년 음악 영화 < 베러맨 >은 도무지 우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쇼맨의 어두운 면을 가리킨다. 수만 관중을 상대하는 데 느낀 엄청난 중압감은 코카인 중독으로 이어졌다. 예전에 읽은 “투어의 반절을 기억 못 한다”란 인터뷰가 떠올랐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일 뿐, 영화의 플롯은 비교적 로비의 경력을 친절하게 따라간다. 로비는 “애스홀(똥구멍)”으로 묘사하는 매니저 나이젤 마틴 스미스에 의해 1990년대 지축을 흔들었던 보이그룹 테이크 댓에 가입하지만 약물 남용과 각종 기행에 “미운 오리 새끼”로 낙인찍힌다. 개리 발로우의 저택에서 마크 오언과 제이슨 오렌지, 하널드 도널드로부터 퇴출을 권유받은 로비는 엉뚱하게도 식탁에 있던 큼지막한 수박을 차에 싣는다.
개리 발로우와의 애증 관계가 익히 알려져 있다. ‘Back for Good’을 비롯해 테이크 댓의 주요 작곡가로 대부분의 수익을 가져간 개리의 재능과 부(富)를 질시했다. 90년대 영국 최고 탤런트 또한 테이크 댓 시절에는 때론 로비에게 냉랭했던 걸로 보인다. 음악적 자기 주도성을 가져가려던 로비의 작사에 처음엔 긍정적으로 반응하나 다툼이 벌어졌을 땐 “가사 몇 줄 끄적인 것 같고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공격한다.
치솟는 명성과 반대로 하락하는 자존감과 사라져가는 인간관계에 로비는 깊은 늪으로, 심연의 바다로 침잠한다. 아버지와의 화해를 필두로 인생을 아름답게 가꿔주었던 지인들에게 사과와 감사를 표시한다. 테이크 댓을 떠나며 가져갔던 수박에 “형아 사랑해”라는 문구를 새겨 개리를 향한 사랑을 표시했다. 긴 세월을 거쳐 두 사람은 원만한 관계가 되었다. ‘The Flood’와 ‘Kidz’를 수록한 여섯 번째 정규앨범 < Progress >에 로비가 참여했으며(그다음 앨범인 < III >엔 로비와 제이슨 오렌지가 빠진 3인조였다) 무려 펫 숍 보이스가 서포트로 나선 2011년 < Progress Live >로 팬들에게 선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른 2010년도 곡 ‘Shame’에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What a shame we never listened)
저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죠.(I told you through the television)
결국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And all that wwent away was the price we paid)
사람들은 한평생을 이렇게 보내곤 합니다.(People spend a lifetiem this way)
너무 부끄러울 뿐이에요(Oh what a shame)”
지금에야 잘 거론 안 되지만 1996년 조지 마이클의 ‘Freedom 90’을 리메이크한 ‘Freedom’이 영국 싱글차트 2위로 화려한 데뷔를 알렸다. 마찬가지로 싱글차트 2위를 기록한 시원시원한 로큰롤 ‘Old Before I Die’와 나른한 분위기의 ‘Lazy Days’(8위)가 실렸지만 역시나 4위에 오른 ‘Angels’가 본 앨범의 진수와도 같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Wonderwall’과 더불어 1990년대 낳은 영국의 “비공식 국가”와도 같은 이 노래는 2005년 무려 조이 디비전의 ‘Love Will Tear Us Apart’와 퀸의 ‘We Are the Champions”를 꺾고 “지난 25년간 영국 최고의 노래”에 선정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Nl40iCABzs
상대방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고백하는 가사로 아마 프로포즈송으로 많이들 부를테지만 할머니 베티 데이비스(Betty Davis)를 위한 추모 의미가 강하다. 별세 소식을 들은 직후 ‘Angels’ 무대에 선 로비는 감정을 삼키나 이내 격앙된 목소리와 비오는 날 할머니 장례식 시퀀스가 오버랩된다. 시신을 담은 관과 우산 등 온통 검정으로 뒤덮인 비오는 날 모습의 부감샷이 인상적이었다.
로비는 늘 자작곡을 꿈꿨다. 테이크 댓 시절부터 피력했던 열망은 힐러리 더프부터 안드레아 보첼리, 캐롤 킹과 협업한 체임버스를 만났고 오랜 기간 파트너십을 이뤘다. 두 사람이 ‘Something Beuatiful’ 작업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된다. 영화는 2001년에서 멈추지만 이 곡과 초반부 등장하는 대표곡 ‘Feel’이 2022년도 정규 5집 < Escapology >까지 아울렀다.
기본적으로 메인스트림 팝 경계에 들어가는 팝스타지만 로커 성향이 짙다. 애인 니콜 애플턴이 있던 올 세인츠의 ‘Never Ever’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칭찬 못 할지언정 같은 파티장에 있던 오아시스는 “그래도 곡다운 곡을 쓴다”라고 치켜세울 만큼 로큰롤에 푹 빠졌다. 두살 위인 오아시스 프론트퍼슨 리암 갤러거와 금세 친해졌고 무대에서 오아시스와 함꼐 노래 부르기도 했지만 이내 앙숙이 되었다. 2000년 브릿 어워드 수상 소감에서 리암에게 복싱 매치를 요구하는 장면도 영화에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1997년 데뷔작 < Life Thru a Lens >에도 록 질감 다분하다. 상기한 ‘Old Before I Die’와 ‘Ego a Go Go’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2003년 넵워스(Knebworth) 콘서트 ‘Let Me Entertain You’가 좌중을 휘어잡는 엔터테이너와 록스타라는 양대 정체성을 극대화했다. 지상 과제이자 최대 목표였던 넵워스에서 ‘Let Me Entetain You’를 불러제끼던 로비는 관중석 곳곳에 숨어있던, “자신을 의심하고 괴롭히는” 얼터 에고 침팬지들과 일대 전투를 벌인다. 기다란 검으로 상대를 휙휙 베는 이 시퀀스는 흡사 < 혹성탈출 > 시리즈 보듯 강력하고 역동적이다.
“공연 중 갑자기 다중 자아와 사투를 벌인다니” 의아할 수 있는 지점이 < 베러맨 >의 핵심이며 로비 윌리엄스와 감독 마이클 그레이시의 주 메시지일테다. 우리가 보는 로비 윌리엄스는 고약하고 거침없으며 도무지 긴장이라곤 안 할 것 같은 사람이지만 사실 경력 내내 극심한 무대공포증(Stage Freight)으로 괴로워했으며 거어릴 적부터 이어졌던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와 조롱이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로비가 공연할 때마다 환호하는 청중 사이로 팔짱 낀 채 “얼마나 잘하나 보자” 째려보는 침팬지가 보이는 것이다.
대중이 보는 이미지와 유리된 본질 혹은 실체.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이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 이미지와 본질의 거리가 멀수록 놀라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유명인으로서 미디어와 대중을 상대하기 위해 두른 단단한 갑옷을 벗어 던지고, 억지 터프니스를 버리고 하나의 인간 “로버트 피터 윌리엄스”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감동적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