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6일 열린 A Tribute To Nujabes
종종 방문하는 “힙합타운”이라는 온라인 레코드 스토어가 있다. 힙합을 필두로 소울과 훵크, 재즈 등 블랙뮤직을 망라한 망망대해,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 구입한 DJ Krush의 < Strictly Turntablized >(1994)와 < Code 4109 >(2000)를 통해 “아 일본에도 이렇게 뛰어난 힙합 프로듀서/디제이”가 있구나 감지했다.
일본 재즈 트럼펫 연주자 콘도 토시노리와 협업한 < Ki-Oku >(1996)는 구하기도 어렵지만 음반의 만듦새와 완성도도 탄탄한 야심작. 래퍼와 재즈 뮤지션의 합작품이란 측면에서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와 전설적인 베이시스트 론 카터, < Jazzmatazz > 시리즈에 도날드 버드를 초빙한 래퍼 구루가 떠오른다.
누자베스의 이름은 디제이 Krush보다 훨씬 먼저 접했다. 깊게 파고든 적은 없지만 일본 재즈 힙합과 거의 동일시되는 등식과 이른 죽음으로 인해 늘 가까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에 대한 심상이 더 강화된 건 잠깐 함께 웹진 IZM에서 활동한 어느 필자 덕분이었다. 연대 음대를 나온 수재인 그는 케이팝을 비롯해 여러 음악을 좋아했지만 누자베스를 인생 아티스트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소속한 웹진 “2024 올해의 국내 음반”으로 오코예의 < Whether The Weather Changes Or Not >에도 누자베스를 호명하며 재즈 힙합 권위자를 찬양했다.
For Nujabes
오후 10시경 이태원과 한강진역 사이 더 블랙 레이블 건물엔 수백 명 인원이 길게 줄지어있었다. 딩고뮤직에서 힙합 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제작한 DF(df.dingo)와 전통 있는 힙합 클럽 볼레로가 공동 기획한 “A Tribute To Nujabes(누자베스에 바치는 헌사)”. 2010년 2월 26일,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떠난 딱 16년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장인” 디제이소울스케이프, RDF와 더불어 디제이 Krush가 추모의 시간을 그려냈다. (후기를 종합한 결과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는 모종의 이유로 출연하지 않은 것 같다)
DJ Krush가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이 날 시간표로 보아 내가 처음 본 DJ는 Bluehour 인 것 같다. 후술할 두 아티스트에 비해 담백하니 누자베스의 원작을 잘 살렸달까, 정확한 이름도, 누자베스의 곡인지도 헛갈리지만 1960-70년대 일본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흘렀을 법한 고즈넉한 트랙이 인상적이었다.
RDF는 스크래칭이 매우 적극적이었고 박력 있었다. 레게에서 분화되어 환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덥(Dub)에 거센 로큰롤 펑크(Punk)를 결합한 덥펑크(DubPunk)에 일가견 있는 그는 얼마 전 작고한 로이 에이어스의 ‘Everybody Lovs the Sunshine’(리믹스 혹은 리메이크 버전으로 추정)와 레온 웨어의 ‘Why I Came to California’, 필라델피아 출신 하우스 듀오 바 누아르(Bas Noir)의 ‘Superficial Love’ 같은 트랙들에 (자신의) 스크래치 인장을 새겨넣었다. 마무리는 어쓰 윈드 앤 파이어의 ‘Let’s Groove’로 장식했다.
턴테이블 물아일체
두 대의 턴테이블에 놓여있는 두 장의 바이닐, 각 바이닐의 리듬을 잡아채고 엮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비트 저글링”. 비트에 대한 천부적 감각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 물리적 숙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턴테이블리즘의 대표 기술이다.
빈티지하면서도 사양이 뛰어난 베스탁스(Vestax) PMC-20SL을 이 날 사용한 Krush는 PMC-20SL에 내장된 “비기”와도 같은 샘플을 공연장에 풀어헤쳤다. 오른손으로 드럼 샘플을 두드리며 턴테이블 바이닐에서 흐르는 비트와 매칭시키고, 왼손으로 페이더를 조작해 드럼 샘플을 편집하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그 앞에서 멈춘 걸까, 찰나의 미학이라고 할 만큼 매 순간 예측불허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Ki-Oku >와 < Meiso >(1995)에서 재즈-힙합을 시도했던 DJ Krush는 ‘Horizon’과 ‘Think Different (feat Substatial)’, ‘Spiral’ 등 띠동갑 후배의 미려한 선율에 자신의 음향을 덧입힌 새로운 곡조로 최선의 헌사를 바쳤다. 누자베스의 대표곡 ‘Luv (sic.) Modal Soul Remix’을 연주할 땐 관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2시쯤 행사장에서 빠져나왔다. 칵테일 대신 생수만 홀짝인 게 서글펐지만 4시간에 달하는 재즈 힙합 여정이 만족스러웠다. 새삼 국내 팬들의 누자베스를 향한 애정을 감지했고,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도 짐작했다. 뜬금없지만 라임버스의 ‘독백’과 키네틱플로우의 ‘몽환의 숲’같은 멜랑콜리한 국내 힙합이 듣고 싶어졌다.
이벤트 중심은 누자베스였지만 DJ Krush도 그에 못지 않은 전설임을 확인했다. 상투적이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느꼈달까. 지난 11월 초 도쿄의 클럽에서 목격했던 브라질 디제이 DJ Nuts와 마찬가지의 주관과 뚝심이 “턴테이블리즘은 이런 거지” 외치고 있었다. DJ Krush의 1시간 세트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