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로그 1 (1회)

가방의 무게

by Eunyoung Kim


플로로그 1

가방의 무게

아미는 어깨에 걸린 가방으로 돌을 옮기는 기분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방이 무거운지. 자신이 가방을 메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가방이 자신을 끌고 가는 것 같다. 겨우 도서관 정문 앞 높은 계단 아래까지 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계단은 참 많기도 하고 한없이 높다. 가방을 그 자리에 내려놓으면 좋겠다 싶지만 내려놓고 싶은 것은 가방보다는 무거운 자신의 마음이다. 토요일은 보통 밀린 잠을 자는 날이지만 오늘은 서둘러 집을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집을 나오고 싶었다. 집이 오히려 낯설다. 어젯밤에 집에 들어가고 오늘 아침 나오기까지 집에 머문 시간은 몇 시간이 안 된다. 가서 자고 밥만 먹고 다시 나온 것 같다. 어젯밤에 과외 끝나고 집에 들어가니 11시가 넘어 거의 12시였다.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화장실에 들어가 씻는 동안 엄마는 밥이랑 국이랑 데워서 내어 주셨다. 늦은 밤이라 입맛은 없었지만 엄마에게 미안하니까 대강 먹는 척하다가 다시 책상에 앉았다. 다음 주일에 있을 기말시험 준비를 위하여 아직 꼭 다시 보아야 할 부분을 보려고 책상에 앉았다. 이번 기말고사는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기말고사이고 입학 사정에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점수이다. 예상문제를 일별하면서 밑줄 친 부분을 암기하다가 책상에 그냥 엎드려 잠이 들었나 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침대로 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렇게 잠이 쏟아졌는데도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에 일찍 깼다. 무언가 불안한지? 아니면 불편하다. 잠은 쏟아지지만 일어나고 싶었다. 일어나서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나왔다.


일어나니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엄마는 어디 계신가? 아빠가 어젯밤에 안 들어오신 것은 안다. 현관에 벗어놓은 아빠의 구두가 안 보인 건 여러 날 된 것 같다. 아빠가 제네바 기후재판 준비 모임을 다녀온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어린이들의 생존권'을 위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는 아빠. 늘 그랬다. 아빠는 세상을 구하러 떠나고, 집에는 낡은 운동화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 낡은 운동화가 불쌍해 보였다. 기후 마치(March) 때마다 신어 밑창이 닳아버린 그 운동화는, 마치 거대한 위기 앞에 선 지친 파수꾼의 잔해처럼 보였다. 운동화는 기후마치나 환경운동을 하러 나갈 때 신으신다. 그러나 아미는 그 생각을 재빨리 지웠다. 자신은 고3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책가방 없는 금요일' 운동도 고3인 아미에게 해당이 안 된다.


엄마 방에서도 기척이 없다. 혹시 엄마가 주무시고 있을지 몰라서 까치발을 하고 조용하게 이층 화장실로 올라갔다. 물소리를 안 내려고 수도꼭지를 작게 틀어놓고 세수를 했다. 얼굴에 몇 번 물을 끼얹는데 부엌에서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서 해!"라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다. 아미는 저도 모르게 물소리를 끄고 부엌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싸늘한 정적이 집의 아래층에서 윗층으로 올라온 것 같다. 엄마가 전화를 끊었나 보다. 말투로 보아 아빠와의 통화였던 것 같다.


"또 협박전화 받았어? 애 있는 집에 왜 그런 전화가 오는 거야? 당신이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엄마가 몇 주 전에 아빠에게 쏟아냈던 말들이 기억났다. 그때 아빠는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아미가 살아갈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고. 먼 장래가 아니야. 아미의 성년 시절, 한참 성년으로 힘차게 살아가야 할 그 세상이…." "아무도 관심 쓰지 않는데 왜 당신만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그리고 이율배반적이지 않아? 아미를 위한다면서 정작 아미 옆에는 없잖아! 가장 중요한 고3에 그 애를 위해 해 주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모든 걸 내게 맡기고 당신은 밖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잖아!" 그날 밤, 아미는 이어폰을 끼고 수학 문제집에 파묻혔었다. 마치 적분과 미분이 부모님의 갈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고요함은 때로 폭력이 된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분위기가 왠지 낯설지 않다. 언젠가부터,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환경 마치에 나가고, 국제 회의에 참석하고, 어린이들의 생존권을 위한 소송을 준비하면서 집을 비우는 날이 늘어났다. 엄마는 처음에는 자랑스러워했지만, 협박전화가 오고, 아빠의 사진이 악플과 함께 인터넷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당신이 이런다고 돈맛에 쩔은 정치인과 화석연료회사들이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어?" 엄마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폭염과 폭우... 뉴스에서 매일 쏟아지지만 그 뉴스에 대한 반응은 엄마와 아빠는 아주 달랐다. 아빠는 앞으로 더 심해질 자연재해의 강도를 예측하며 크게 걱정하지만 엄마는 자연재해는 언제나 있었는데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신다. 아빠는 아미를 위하여 그 어찌할 수 없는 것들과 싸우고 있었고, 엄마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것이 아미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아미는 문득 고3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모른 척해온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엄마의 말이 새삼 아프게 가슴을 친다. '고3'이라는 말과 '공부'는 어쩌면 아미의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가슴 한쪽에 밀어놓은 걱정의 보따리가 눈이 있는 듯 어둠 속에서 아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수능, 부모님의 갈등, 기후변화, 인류세라고 부르는 지구의 제6차 대멸종시대, 감당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밀어닥치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허무'이다.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다'는 전도서 1장의 허무가 그녀를 옥죄이고 있다. 그래서 엄마의 배려도 아빠의 기후운동도 아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려 처지는 어깨에서 가방을 다시 들어 올리고 도서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D-65. 어제 교실 칠판에 적힌 숫자가 눈에 밟힌다. 65일. 아침에 눈을 뜨면 영어 단어장, 버스에서는 이어폰으로 듣기 평가, 밥 먹을 때도 손에서 펜을 놓지 못한다. 수학 문제 하나에 3분, 영어 지문 하나에 4분.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깝다. 선생님은 말한다. "너희에게는 시간이 없어."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고, 아미는 그 모래알 하나하나를 붙잡으려 허우적거린다. 아미가 수능을 치는 날이면 비행기도 멈추고, 경찰이 지각생을 태워다 줄것이다.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이다. 온 나라가 수능을 치는 고3에게 주의 집중하는 그 하루. 그 하루를 위해 12년을 달려왔고, 이제 65일이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미는 그 하루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이 자신에겐 그렇게 커다란 의미를 주지 않는다. 아니 자신이 이 날에 의미를 주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말이 되면 다른 고3 아이들은 학원으로 달려가지만, 아미는 학원 대신 도서관에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빠가 허락하셨다. 밀린 숙제와 시험 준비를 하러 가는 길이지만, 어쩌면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서 학원이 아닌 도서관 핑계를 대는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 있는 기말고사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 아닌 이유다. 시험과 시험을 잇는 고3의 생활인데도 언제나 시험은 익숙하지 않다. 이번 기말고사 성적이 내신에 들어가고, 그 내신이 수능과 합쳐져야 비로소 원하는 대학의 문이 열린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마음이 자꾸 시험에서 멀어져 간다. 도서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내다봤다. 아미의 마음은 서둘러 집을 나오면서 가방에 쑤셔 넣은 책과 공책, 필통만큼이나 정리가 안 된 채 덜컹거린다. 가방의 무게만큼 무겁기도 하고, 또 그만큼 허탈하기도 하다.

도서관에 가려고 현관으로 나오는데 엄마가 가방을 들어주면서 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아미야, 아무 걱정 말고 공부에만 신경 쓰도록 해. 너만 잘되면 엄마는 더 바랄 게 없어." 엄마의 말이 어쩐지 슬프고도 단호하게 들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어쩌면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의식적으로 고3 들어와서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 모두를 한쪽으로 쓱 밀어버린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한쪽으로 밀어내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지난 금요일 하교길, 단짝 채령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것만은 자꾸 가슴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3년을 함께한 유일한 친구, 채령.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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