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머리로 일어났다. 윗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서 침실의 시계가 7시가 훨씬 지난 것을 확인했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밖은 어둠침침하고 눈동자는 아직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가 불을 환하게 켰다. 환한 빛으로 내 눈동자에게 아침을 알려주려함이다. 이제, 눈에는 무엇이 보이나 머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어제밤 3시 반이나 넘어서 잤으니 당연하지’.
어제밤 기억이 난다. 침실로 가면서도 나는 잠들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랬다. 올빼미형인 나는 낮보다는 밤 시간에 정신이 더 맑아진다. 밤 시간에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해낸다. 때론 낮에 못해서 며칠씩 밀어놓았던 일을 하루밤만 꼬박 새면 다 해낼 수 있다. 생산성이 밤에 확실하게 더 높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밤을 새고 창 밖이 훤해지면 ‘아이쿠 잠은 자야지’ 하면서 침대에 쓰러지지만 몸과는 다르게 시원하고 뿌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면책을 읽기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세계적인 수면과학자 매슈 워커가 쓴 ‘우리는 왜 잠을 자야할까’의 주제는 ‘일생의 1/3을 보내는 잠은 우리 건강에 참으로 중요한데도 현대인은 그것을 시간낭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잠은 “건강을 돕는 무수한 혜택을제공하며, 24시간마다 되풀이되면서 당신을 회복시키는 처방전이다. 그러니 그 처방전으로 받아라” 라며 독자에게 사뭇 명령까지 한다. 그책을 통하여 그 명령을 납득했기에 나는 처방전을 받기로 했다. 책에서 제안한대로 10시에서 6시까지의 8시간의 잠을 꼭 자려고 야심찬 계획을 했다. 그런데, 그책을 끝낸지가 벌써 1년 반은 되어가는데 아직도 고투중이다. 그약속을 지킨 날이 아마 1년반동안 한 이틀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모든 날들은 시도와 실패, 그리고 갈등의 날들이었다. 거의 매일.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내속에서 싸워왔다. 문제를 분석해 보면 결론은 내 몸과 마음이 서로 동의하지 않는것이다. 10시에 잠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9시 반에 잠자리 준비 알람을 설정해 놓았다.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잘 준비를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아예 습관이 되었다. 몸은 들은척도 하지 않는다. ‘너무 일러. 하던 것 마저 끝내야 돼’ ‘이것 내일로 미루는 것보다 오늘 하는게 낫잖아?’ 몸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아무 거리낌없이 약속이건 알람이건 상관없다는 듯이 엉덩이를 계속 의자에 눌러붙이고 있다. 머리는 약간의 갈등은 있지만 몸의 의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렇게 싸우며 일을 하다가 언듯 시계를 보면 12시가 넘었다. ‘아이쿠’ 그제서야 몸이 일어난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잠자리에 갈 준비를 한다. 때로는 세수하느라 잠이 개어서 다시 책상으로 간다. 그런날에는 영락없이 1시 2시를 넘는다.
어제가 그런날이었다. 요근래에는 그래도 드물게 3시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3시가 훨씬 넘어도 침대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 들어 가기 싫다. 어제까지는 ‘또 이랬네! 거봐 나는 할 수 없어.’ 하면서 죄책감으로 갈등하면서 침대로 들어가는것이 지난 1년반동안의 거의 똑같은 나의 루틴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갑자기 내 머리속을 치는 생각은 “흠, 나는 내 삶을 너무 사랑하나봐”. “잠자리로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괜찮아졌다. 죄책감도 없어지고.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도 잘 잔 것 같다.
머리속 하늘을 맑게 하기 위해 밖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마당 한바퀴돌면 맑아지리라 . 밖으로 가야할 목적이 또 있다. 요새 나는 내 집과 친하는 중이다. 날씨가 풀리고 목련꽃도 지고 싹들이 여기저기서 돋아나온다. 제일 먼저 눈속에서 이름 그대로 설강화(snow drops)가 폈고, 그레이프 히아신스, 크로커스, 수선화가 폈다. 꽃이 피어야 녀석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지난 11월에 이사온 이 집에 어떤 녀석들이 살고 있는지 그 정체를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싹들은 나기만 하면 마당과 연결된 산에서 사슴 가족들이 내려와 먹어치운다. 눈속에 있는 것 까지도 거의 다 잘라먹어서 싹의 위가 베어먹힌채 자란다. 그래서 더욱 어떤 녀석들인지 모르겠다. 봄이 되자 이들의 자라는 속도가 빨라지고 사슴녀석들도 먹이가 풍성해져서인지 덜 먹는 것 같다.
마당의 다른 잡초들도 어느정도 신원파악을 했다. 내가 그 이름을 아는 것들만. 황새냉이, 달래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싹들이 나오는데 어떤 녀석들인지 무척 궁금하다. 잔디밭을 둘러보니 연잔디가 제법 키가 소복히 자라 연두색으로 온 마당을 덮고 있다. 나의 심각한 인스펙션(inspection)이 시작되었다. 샤록 홈즈처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다. 어떤 녀석들이냐 너희들! 민들레며 토끼풀이 작은 잎들을 한잎 두잎 내고 있고 잡초인것 같은데 이름모른 것들과 보라색 제비꽃도 군데군데 피어있다. 황새냉이는 먼저 벌써 꽃대를 세우고 하얀 꽃들을 달고 있다. 이웃사람의 말로는 녀석들은 이지역의 골치아픈 침입성 식물이란다. 둘러보니 아주 많다.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뽑기 시작했다. 꽃대를 잡고 쏙 올리면 아직 뿌리가 깊히 박히지 않아서 쉽게 빠진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산속에 가득하다. 하얀 황새냉이 꽃대들이 여기저기 막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는 대로 옮겨다니며 쪼그려 앉아서 뽑다보니 불편하다. 엉덩이를 슬그머니 잔디에 내려놓고 비스듬히 땅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갑자기 몸이 산뜻해 졌다. 축축한 대지의 봄기운이 내몸속으로 퍼지는 듯하다. 아니 정말 그렇다. 대지와의 스킨쉽이다. 땅속에서 오물거리는 생명들의 기운이 엉덩이에서 척추로 팔로 머리로 퍼져나간다. 숲에서 나무를 안는 기분이다. 나는 숲에가면 츄리허거(tree hugger)이다. 혼자 산책할 때면 임의로 정해놓은 몇개의 나무를 지날때엔 언제나 안아주고 간다. 아니 내가 나무에게 안긴다. 그 나무에게로 가서 내 두 발을 나무 뿌리 부분에 바짝대고 내 몸의 모든 부분이 가능하면 최대한으로 나무에 닿게 하여 나무처럼 일자가 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하면 나무가 된 듯 머리 위로 연장되는 나무 기둥을 타고 높은 하늘까지 올라간다. 그위의 푸른 하늘을 본다. 두팔은 나무 기둥을 안고 배와 나무의 몸통과 일치시킨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나무의 기운, 수액이 오르내리는 그 현장을 느낀다. 뿌리가 있는 발아래로 나의 뿌리가 대지속으로 들어가 자갈밭 속의 샘을 찾아 이리저리 크고 작은 돌을 매 만진다. 나는 자연이다. 숲이 나의 성소이다.
나의 오늘 이자리, 내가 엉덩이를 땅에 대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갔을 것이다. 이집이 세워진지 230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 살았을까? 그렇다. 잘못 들은게 아니다. 230년이다. 볼티모아시에 역사현장(historical site)으로 등재되었다. 1790년에 지어져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세계 1차 2차 대전과 대공황을 격었다. 수천년동안 이곳 수려한 산 사이로 흐르는 줄기찬 강 페탑스코강의 유역에는 미원주민들이 살아왔다. 유럽인이 이곳에 들어오고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고 1790년경 한 유럽인이 이곳 원주민들과의 교역권을 가지고 페탑스코 강을 이용한 에너지로 밀공장을 설치할 권리를 따내었다. 이집은 처음에 그공장의 직원들의 숙소로 지어졌다. 계절이 230번 바뀌면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일로, 어떻게, 이곳에서 살다 갔을까? 나 또한 이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고 누군가가 또 이자리에 앉게 될테다.
새소리가 요란하고 아침 공기가 차다. 저기, 황새냉이 꽃대들이 하얀꽃을 달고 또 많이 저곳에 모여있다. ‘오늘은 저녀석들을 내 뜰에서 다 뽑아낼테다’. 목적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살아있음이 얼마나 귀중한지. ‘역시 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래, 살아있음이야! 뽑고 싶은 저 황새냉이가 눈에 보이고, 저 아름다운 새소리가 귀에 들리고, 싸늘한 아침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대지의 상큼한 생명력이 축축한 바닥에서 온 몸으로 퍼져 나가고’. 어제 저녁 침대로 들어가면서 내게 뇌이던 말, 그말을 다시 확인했다. ‘나는 살아있음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