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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Jun 20. 2022

남편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 이젠 갚아줄 차례다.

시댁과의 고부갈등에서 남편은 빼놓을 수가 없는 키워드이다.

남편은 시댁 가족들과 나의 연결고리 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남편과 나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에서는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단 설명을 해야   같다.


나는 외국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코로나의 두려움에 떨 시기.

그래서 모든 대학교 포함 아이들의 학교가 다 문을 닫고,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시작하던 시기.


그때 나는 박사 후 연구원이란 일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남편은 졸업 논문을 한창 쓸 시기였다.

우리는 그때 1  정도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박사  연구원 일을, 남편은 대학원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정말 둘이서 로테이션 돌면서 애를 보면서 일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 동안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진건 한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아이 처음 유치원 보내고 가졌던 첫 둘만의 아침식사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 유치원 보내고 한 달 뒤 코로나가 터져서, 결국 아이를 집에서 돌봤고.

나는 애를 등에 없고, 붙들어 매고 밤새워 가며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고, 운 좋게 일자리를 얻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너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거면서 뭐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거니?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라고 하실 수도 있다.

당연히 내가 선택한 길이고 감내해야 되는 부분이지만,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항은 예상치 못한 변수들을 많이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새로 일을 하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우리는 아이를 보낼 유치원을 찾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기존 유치원들이 신규 등록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1년 가까이, 베이비시터를 파트로 고용해서 1시 반부터 5시까지 아이를 봐주시라고 부탁했었고

나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남편도 집에서 논문 준비와 취업 준비를 같이 병행했었다.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나이 때는 엄마를 한창 찾을 시기라 베이비시터에게 맡겨놨다 한들 아이는 중간중간 엄마를 찾았으며, 나는 낮에 미팅 참여 외에는 일을 제대로   없었기에 


나는 아이가 잠든 8시부터 그다음  새벽 5시까지 1 동안 일을 했었으며, 과도한 무리와 스트레스는 결국 나의 심장에 문제를 가져왔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심장이 너무 아팠었다. 나중에 한국 의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급성 협심증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서 입안에 뿌리는 스프레이 같은  처방해 실 정도였다.


나는 항상 화가 나고 짜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땐 내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었었다.

정말 깜깜한 터널 안에 있는데, 밖에 빛이 있는 곳으로 나가고 싶어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더 안 좋은 상황들이 계속 나에겐 왔었다. 그때는 뭘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안간힘을 쓸 때마다 누가 나를 못 나가게 깜깜한 터널 안 다시 처 박아두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 사진이 그때의 내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나는 정말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1년 동안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었다.

성과가 나와야 계약이 끝나기 전에 일자리를 지원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너무 암담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다.  


나의 부족함도 큰 요소였겠지만, 내가 일하는 프로젝트 특성상 다양한 교수들이 함께 참여를 했었는데

그들의 의견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아  연구 결과가 도출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걸렸고,  외에도 너무 많은 일들이 나에게 물밀듯이 쏟아 들어왔었다.


나는 매일 교수한테 까이고 있었으며, zoom 메일로 주고받는 외국어는 그들에게 정확한  의사가 전달되기엔 역부족이었으며, 그들과 유연한 대화와 관계를 형성하기엔 한계가 많은 환경이었다.

2년 계약이 끝나갈 무렵에 처음으로 지도하는 어드바이저 얼굴을 봤으니. 말 다한 것 같다.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좀 어땠을까. 새로 이사 온 보금자리엔 내가 알던 사람들은 없었고,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도 만날 수도 없었다.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엄마인 나는 어린 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코로나는 정말 두려운 존재였고,

걸렸다고 하면 그 의료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기에 항상 조심하고, 우리 가족은 1년 넘게 고립된 생활을 했었다.


남편도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논문을 쓰느라, 졸업을 준비하느라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지 못했었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러 올 수 없었다. 다들 코로나로 비행기 타는 것도 꺼려했기에.

돈은 나 혼자 벌었었고, 그 돈으로 우리 가족 의료 보험, 생활비 나가니 남는 돈도 없었다.


그때 당시 나보다 더욱더 힘드신 분들도 많았겠지만, 나도 그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었다.

한두 번은, 그냥 욕실에 길게 달려있는 샤워기 줄에 목을 매달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들 정도로 이 모든 상황을 나 혼자 힘겹게 버텨 나갔었다.  


남편과 나는,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많이 지쳐 있었고,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특히 내가   그랬던  같다. 그래서 남편도 나의 예민함에 그리고 본인의 힘든 상황에 지쳐있었던  같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 자주 남편은 언성을 높였었다.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그랬었다.

연애할 때도 몇 번 그런 적이 종종 있어 싸웠었지만 아이 앞에서도 언성 높이는 그의 모습은 내가 참을 수가 없었기에 크게 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남편은 지쳐있는 내 짜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건 내 잘못이 컸다는 거 인정한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언성 높이는 건 아빠로서 자제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나는 그 시아버지가 떠올라서 정말 몇 배는 더 싫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잘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1년 뒤에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도 컸지만 일을 해야 했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가 없어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남편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4시간  떨어진 곳에 일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일주일에 4 이상 아이의  하원은 나의 독박으로 전환되었다.


아이를 2 반에 픽업을 했었기에 나는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아이 도시락 싸고 아이를 8 반에 등원시키고 나서 오후 2 반까지는 정말 미친 듯이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게  유일한 시간이라서 너무 소중했었다.


한 번은 너무 많이 지치고 힘들어서, 한국에서 오시지 못한다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엉엉 울면서

 "엄마 제발 한 번만 와줘. 나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 엄마. 내가 이런 부탁은 한 적 없었잖아"

하고 간절히 빌고 빌면서 부탁했다.

외국 살이 하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 힘든 내색도 안 하고 살았었다.


내가 엄마한테 엉엉 울면서 전화해서 애걸복걸하니 엄마는 한참 고민을 하시고는 결국 하던  미뤄두고 3개월 비자를 받으시고 내가 있는  머나먼 외국 땅에  주셨다.


나는 어렵사리 와준 엄마가 너무 고마웠고, 너무 외롭게 홀로 싸워야 했던 내 공간에 엄마가 와준다는 이유 자체가 나에게는 한줄기 빛 같았다.  엄마가 와준다는 생각만으로 설레었고,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했었다.


엄마가 내가 사는 곳에 왔던 건 출산 도와주러 오셨던 10일이 다였다. 그때는 산후조리 때문에 엄마가 집에서만 있다가 한국을 가셨기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엄마랑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엄마랑 여기저기도 가고 싶었고, 엄마한테 그동안 힘들었던 내 마음도 위로받고 싶었다. 엄마한테 유일하게 많이 기대고 싶었다. 안 그러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마지막 동아줄 잡는 마음으로 엄마한테 의지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내 남편은 장모님이 3개월 오신 거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시간 반 거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장모님이 집에 계시니 편하게 쉴 수도 없고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난 그 부분은 100퍼센트 이해한다.


그래도 나는 내 남편이 결혼생활 기간 동안 외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나의 엄마와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사위 노릇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 서로 가까워지고, 엄마도 이참에 사위와 조금 은 돈독해졌으면 서로 좋은 추억을 만들었음 하는 생각을 했었다.


2021년 12월 중반에 엄마가 오셨었다.

2021년 12월의 마지막 날. 남편과 싸움이 있었다. 그날 남편과 싸운 건 별일은 아니었다.

내가 남편이 걱정되는 상황이 있어 걱정을 했던 말을 한 것 같은데

남편이 나에게 "내가 그냥 알아서 할게"라고 짜증스럽게  강하게 되받아쳤던  말이 나는 서운해서  마디 했던  결국 남편의 언성으로 이어졌고,  당시  안에는  아이가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마무리를 하는 날이었다.

2021년을 지치고 힘들게 보냈었고, 그 1년 동안 남편의 욱하는 성질머리로 여러 번 싸웠었고 그는 용서를 여러 번 구했었고 나는 그를 여러 번 용서하고 지나갔던 그 해였다.

나는 그 해가 하루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바랬었다. 하지만 1년 마지막 날까지 여전히 같은 모습을 보이는 남편에게 화가 났었다. 엄마도 와계신 중인데 말이다.


그날 우린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는 우리가 싸워서 싸하다는 걸 느끼셨다고 한다.


정말 솔직하게 나는 딸로서 엄마에게 남편과의 갈등 싸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다.

엄마에게 내가 외국에서 정말 잘 살고 있고 화목하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내 결혼생활의 문제점들을 엄마가 제발 제발 몰랐으면 했었다.

엄마한테 내가 시댁 문제뿐 아니라, 남편과 문제까지 있다는  보여주게 되면 내가 발가벗는 느낌이   같았고,  모든 치부를 엄마에게 보여주는 느낌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남편이랑 싸우는  조심했고, 참고 넘기려고 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집에 있는 동안 불편함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 딸과 사위 때문에 왔는데, 시차 적응도 모든 환경도 다른데  둘의 싸움으로 불편함까지 경험한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남편과의 일을 일단 넘겼다. 엄마가 있었기에 싸우도 싫어서 화내는 감정 자체를 가지기 싫어서. 대충 좋게 합의를 하고 넘어갔는데, 며칠 뒤 그 남편이란 사람은 짜증을 낼 상황이 아닌데도 내 부탁에 온갖 짜증을 내면서 겨우 겨우 참고 있는 내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나는 그날 밤, 그를 1층으로 데리고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 와이프 :

"좋게 이야기할 때 적당히 해" 


남편도 화가 났는지 결국 적당히 하라는 내 말을 무시했고, 우린 서로 열받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사실, 1년 동안 우리는 그냥 터지기 일보직전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남편은 그날 밤 그것도 자정이 지난 시간.


| 남편 :

" 우리 사이엔 중재가 필요한  같다. 장모님을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자. 이렇게 우리 이야기해도 소용없으니깐, 내가 지금 올라가서 장모님 불러 내려올게."

나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 와이프 :

"어디 한번 불러봐.  엄마 지금 데리고 내려와 . 앞으로 너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날 건지. 그에 따른 책임 네가    있으면 어디 한번 불러봐"라고  경고를 했다.


오기에 찬 그 남편은

밤늦은 자정, 결국 내 말을 무시한 채 침대에서 쉬고 있는 엄마가 계신 방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중재가 필요하다며 엄마를 불러 기어코 1층으로 데리고 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어렵게 외국 땅까지 온 엄마에게 내가 남편과 이렇게 일촉즉발이라는 걸 정말 숨기고 싶었다.

그저 외국에서 내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모습만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나와 남편의 싸움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나는 내 치부를 숨기고 싶었다.

엄마가 내 집에서 불편하지 않았음 했다.

나는 정말 정말 내 남편이 엄마를 부르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만약 엄마를 불러 낸다면, 이 결혼 생활 동안 이성을 끈을 붙잡고 그나마 참아 왔던 그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의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동안 혼자 삭혀왔던 내 마음 깊이 간직해 왔던 내 슬픔들이, 절망적이었던 마음들이 정말 다이너마이트처럼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남편이 정말 생각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중재가 필요했더라면, 자정에 어렵사리 잠을 청하려고 했던 엄마를 굳이 부를 필요가 있었을까?

낮에 제정신으로 둘 사이 감정을 가라 앉히고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건 그의 옵션엔 없었을까?


사위라는 인간이 무례하게 자기감정만 앞세워서 중재가 필요하답시고 밤늦게 장모님이 쉬고 있는 방문을 두드리고, 기어코 내가 마지막 자존심으로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우리의 갈등을 내 동의도 없이 나의 엄마에게 말했을 때


나는 그의 아버지가 무례하게 나의 부모님께 전화해서 경우 없이 소리 지르며 욕하던 모습들이 생각이 났고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힘들게 참아왔던 내 모든 감정들을 다 폭발시켜버렸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만 피해가 오는   참고 견딜  있을  같았다. 하지만 아무 연관이 없는  부모님을 함부로 건드는   어떤 누구도 용서가 안되었었다.


이미 시아버지는 내 허락도 없이, 내 동의도 없이 내 부모님께 욕을 하고 경우 없는 행동들을 했으며

그 부분은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었지만, 일단 몇 년 전 지나간 일이라 내 마음속에 덮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남편이라는 인간도 어렵사리 미국까지 온 나의 엄마에게 경우 없이 올라가 중재를 운운하며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또한 내가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부분까지 건드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나에게 "우리의 끝이 어딘지 한번 봐보자"라는 의미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당신은  남편으로서 역할을 끝났다고. 결국  아킬레스건을 건든,  마지막 자존심마저 밟아버린 너를  이상 용서할  없다고.


그때부터였던  같다.

나에게  악마 같은 감정이 생겼던 .


사람이 분노를 넘어서 상대방에 대한 악한 감정이 생기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이번 경험을 통해 많이 알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모습들을 많이 봤었던 계기였던 것 같다.


 눈엔 사람이 가질  있는 모든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었다.


그날부터 남편과 나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쟁을 남편에서 끝이 아닌 나와 내 부모님을 함부로 건드렸던 시댁까지 펼쳐 나갔다.


그 전쟁 기간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어머니도 나에게

"제발 그 독기 서린 눈빛으로 자기 좀 보지 마라" 하셨고

엄마도 나에게

"내 소중한 딸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니" 하며 우실 정도였다.

 

남편은 지금도 말한다.

그때 그 4개월이라는 시간은 자기에게 평생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남았고,

그때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지옥 같은 순간들이었다고.


나는 그에게 이 한마디 하고 싶다.


"너보다 내가 더 지옥 같았어.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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