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의 영문학 경험담
나는 피아니스트이다. 피아노라는 악기와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고 늦게 배운 악기인 만큼 열의를 쏟아부었다. 항상 부족함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노력했다. 많은 콩쿠르에 도전하고, 무너지고 다시 또 일어나 달려보고, 넘어지고를 반복하며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피아노를 하면서 진절머리 났던 점은 끝없는 비교와 주관성이었다. 이 정도로 죽도록 연습했으면 좋은 결과가 있겠다 싶었을 때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나를 반겼고 떨어질 테니 기대도 하지 말자 했을 때는 예상외로 좋은 결과가 나왔다. 생각 외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지독한 교수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연습을 하거나 어찌 되었든 잘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클래스 내에서의 무한한 경쟁과 시기, 질투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대단한 재능이나 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이렇게 포장해버리고 싶은 마음 일 수도 있다.
프랑스에 살면서 언어시험을 여러 번 치게 되었는데 자의 반 타의 반, 으로 영어와 불어 두 개의 언어 모두 B2에서 C1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언어시험을 계속해서 치르면서 느낀 점은 내가 공부한 만큼 정직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평가 시스템이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가족사 이야기를 조금 보태자면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다. 아버지가 밤늦게까지 영어를 공부하는 모습은 나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피아노를 당연히 업으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돌고 돌아보니 나는 소르본 4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었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언어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들어갔던 대학교에서는 전쟁 같은 일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셰익스피어의 시에 대해서 분석하고, 영국사와 미국사를 통틀어 심도 있게 배웠으며 영어와 불어의 통번역에 대해 수업을 들었다. 한 학기에만 한 과목당 4번 이상의 시험이 치러지는데 거의 시험지옥 수준이었다. 프랑스에서 흔히 사용하는 'dissertation' 양식은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논술 양식이다. 한국에서 치러지는 수능과는 다르게 치러지는 프랑스시험 바칼로레아에서는 일주일간 치러지는 시험은 객관식이 아닌 대부분 논술형이다. 대학 시험에서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눠지는 서술형식은 본론 내에서 약 세 개의 논증을 가지게 되는데, 그 안에서도 두세 개 이상의 논증을 써야 한다. 그 안에서는 주관성 객관성을 또다시 나눠서 굉장히 구조화되고 세분화된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나름 공식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은 나도 써 놓고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한 학기 동안 영어와 불어를 머리에 '처넣었다'. 딱히 다른 표현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쏟아지는 시험들, 단어 시험은 2주에 영어와 불어 단어를 2000개씩 외워서 시험을 쳤다. 왜 나는 타고난 재능이 없어서 무엇을 하든 항상 죽도록 노력을 해야 할까, 나는 남들처럼 빨리 가지 못할까 , 수많은 질문거리들을 나 자신에게 던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새벽 3시에 잠을 청하고 겨우 몇 시간 자고 일어나 수업을 들었고, 피아노 교수님 앞에서는 그만 울어버리기도 했다. 당시 나의 낯빛은 꼭 내가 키우는 검정고양이 마냥 얼굴이 비슷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별것 아닌 먼지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부터 나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내가 가진 정체성을 어떻게든 부정하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가진 재료를 잘 요리해 보려 애를 썼다. 첫 PPT 발표 시간에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클래식 음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준비를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준비한 발표는 순조롭게 잘 끝이 났고, 벽에 매일같이 부딪히는 일상이 헛된 것만은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계속되는 여러 과목에서는 논술 글쓰기 시험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피상적인 글들만 잔뜩 찌그리다가 Hors sujet (아웃토픽)를 받기도 하고, 달달 외워 갔던 문법의 언어학 시험에서는 꽤 괜찮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내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상황에 임해보려고 한다.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파리에서 피아노, 통번역과 문학을 공부하며 느낀 점들에 대해 더 써 나가 보려 한다.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