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관심을 먹고사는 존재였다. 관심을 먹고사는 존재는 타인을 기준으로 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아먹고살아야 어떤 것도 잘된다. 공부를 할 때에도 운동을 할 때에도 심지어 게임을 할 때에도. 모든 것이 문제없어 보였다. 그것이 나에게 잘못된 방식이라는 의견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내 모든 것들이 진짜 나였을 테니까.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아닌 타자를 기준으로 두고 행동과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서 그렇지 과거. 그렇게 과거도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것이 정말 내가 기준인지 타자가 기준인지 알 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닌 세계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진짜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휘몰아치는 과도기엔 구역감과 혐오감만이 길 위에 나뒹굴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해도 되는 걸까. 내가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수많은 생각에 그보다 더 많은 결계들이 쳐졌고 사방팔방 둘러싸인 굳은 담 바깥으로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만든 벽이겠지만 거울은 있었다는 점.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이에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았던 도달 했다. 그간의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한 의문점은 없었다. 그러나 맑은 물에 짙고 검디 검은 물감 한 방물만 떨어져도 이후 다시 맑음으로 돌아갈 수 없듯 내 마음속에서도 작은 어떤 것이 통 하고 떨어졌고 그것은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가던 방식을 되돌아보았고 제거하고 또 제거하고 또 제거했다. 파내고 파내고 더 파내었다. 마음속의 모래를 파내었다. 어릴 적 모래사장에 있는 작은 구멍을 수 백개 파본적이 있다. 서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밀물이 밀려들어왔다 썰물의 흐름으로 물이 빠져나간 뒤 몇 시간 후면 뜨거운 햇볕에 모래사장이 메마른다. 그러면 그곳에 있는 작고 검은 구멍들은 살아 숨 쉬듯 나를 반겼다. 나는 수도 없이 그 구멍을 파내었다. 작은 삽으로 두 손으로 나뭇가지로. 그러나 한 번도 그 밑에 도달해 본 적은 없다.
다행인 것은 마음의 모래구멍엔 바닥이 존재했다. 깊은 근원. 흔들리던 삶의 방식의 근원지. 그 근원지에 도달했고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근원의 문을 여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근원은 타인에 기대했다는 것. 내가 이해받길 원했다는 것. 내 사정 좀 알아봐 달라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곳에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이건 필요한 걸까. 위대해진 사람 혹은 세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장 나약한 것은 이해받기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말을 보곤 했다. 어떤 것보다 나약한 것이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바라는 마음이라. 이전의 나였다면 사람은 나약하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다 잡는다. 물론 가장 나약하다는 말에는 동감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는 그 자신. 그 자신은 정말 나약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바라지 않게 된 순간부터 삶의 방식은 뒤집혔다. 일단 말이 줄었다. 말을 줄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심리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약하기에 대화만으로도 그 순간의 틈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한다. 마음이 먼저 품지 않아도 혀가 먼저 그 심리에 트리거포인트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말을 뱉으려 하지 않는다. 그다음에 한 일은 어느 대상에 관한 생각을 지웠다.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인데 타자의 기준점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길다 보니 타자의 행동과 말에 귀를 워낙 잘 기울인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생각과 사정에 대한 상황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하루의 일부분을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문제는 또 나약해진다는 건데 나약해져서 그 사람의 상황을 더 이해해주려 하고 내가 이렇게 이해해주려 했으니 그 사람 또한 나를 좋아해 주겠지? 이런 망할 생각의 굴레에 빠진다. 결국 이해받으려는 마음. 그것이 문제다. 사실 가장 건강한 것이 그저 독립체로서의 존재 나. 그리고 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심지어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관계에서도 말이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
나약하지만 이렇게 아니라고 휘갈겨 썼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해받고 싶어 글을 쓰는 것일 테다. 혹은 나약해지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이성으로 분명하게 안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마음은 고약하게도 또 동일한 마음을 가진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
변화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아쉬운 것은 존재한다. 이해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주변 사람이 줄었다. 오래된 친구들도 부모도 직장동료도. 이런 점을 보면 세상에 단순한 진리는 없는 것 같다. 이해받고 싶어서 살아도 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살아도 되고.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삶은 이유가 있겠지 싶다.
라고 하면서 나는 책이나 보며 글이나 쓰고 운동이나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