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사람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은 이해가 아닌 존중으로 해결되거나 보통 비난된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범위 안에서의 이야기 혹은 상황 혹은 성질은 감정이 격앙되어 범주의 크기가 변질되지 않는 이상 수용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 그러니까 자신의 범주 이외의 경험하지 못했거나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의 범주 속 연결고리가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보통 두 가지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거부 혹은 이해하는 척 정도 하는 것이다. 거부는 반발심에 기원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범주만이 맞는 이야기라는 것을 일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배척하고 무시하고 등을 돌리고 비난한다. 실로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웃긴 것은 자신의 범주가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는 듯한 거대한 착각으로 일어나는 자신만의 할랄인데 말이다. 거기서부터 오류가 발생한다. 자신의 범주. 자신의 범주안에서만 작동하는 원리 틀에서 외부를 소화하려다 보니 체하는 것이다. 그것의 반작용으로 비난 무시 배척 폭력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이해하는 척은? 이해하는 척이라고는 썼지만 그것을 나는 존중이라 표현한다. 그 이외의 방식은 없다고 본다. 이것도 나의 범주안에서의 단정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내 범주이상의 것들은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헐뜯고 넘어뜨리고 위험에 빠뜨리더라도 사실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침묵을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내 범주 이상의 것들은 내가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니까. 존중은 무엇인가. 범주 이상의 것을 그냥 하늘 보듯 하는 것이다. 밤에 하늘이 어둡다고 화를 내는가. 하늘에 걸린 해가 너무 따갑다고 해를 헐뜯는가. 모두 소용없는 일이고 모두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그저 하늘은 하늘일 뿐. 하늘에 걸린 해가 따가운 것은 햇빛 때문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존중은 그런 것이다. 소화할 수 없다면 그저 바라보는 것. 내 범주 이상의 것은 그럴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맞기를 원한다. 나 역시도 그럴 것이고. 자신이 맞음이 중요한 사람도 많다. 비관적인 옳음이다. 맞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성엔 난 큰 도움이 된다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의사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군대를 이끄는 장군. 사업체를 이끄는 사장. 그런 비즈니스 적이나 뚜렷한 목적성을 가진 집단에서는 맞음이라는 것은 법령과 같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해관계성은 모두 객관적으로 동일한 상태인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말한다. 그런 관계는 수평적이며 수직적이 아니다. 그런 관계는 존중과 이해가 필요한 것이지 옳고 그름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내가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런 종류의 변태성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수도 없이 자기기만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자신의 옳음을 정당화시키고 자신의 범주안에서의 이야기만이 성역임을 강조하면 침튀기는 그런. 그 이상의 이야기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 말이다. 나는 우습다. 전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병신새끼라고 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냥 뭐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 또한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내 범주의 영역 이상의 일이니까. 그래서 그저 하늘 보듯 할 뿐이다.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바라는 것은 기대심의 영역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해받길 바란다면 그건 그냥 내 기대심리일 뿐이다.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내가 이해를 받든 이해받지 못하든 그것은 그냥 순리다. 자연의 순리. 그래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심정도 아닌 그냥 내 수준이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늘을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