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나를 더 알아가기

나를 인정하는 나

by 지우

이 길은 마치 고행의 메카로 보인다. 자초한 고행의 길. 그 맞은편에서 나보다 오래 뛴 듯한 혹은 더 고행을 하고 있는 듯한 러너-달리기를 하는 사람-를 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각과 기억의 조각들이 순간을 왜곡한다.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으로 내가 나를 제삼자처럼 볼 수 있게 된다. 나도 저런 모습일까. 얼굴이 다 일그러져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띄고 있을까. 혹은 현자와 같이 세기를 관통한 표정을 지니고 있을까. 냉큼 뒤틀린 왜곡에서 현실로 돌아와 보이지 않는 나의 표정을 감각적으로 확인한다. 상상의 거울을 만들어 본다. 좌우가 다른 거울 속 나를 마주 보며 표정을 가다듬는다. 실제 거울은 아니지만 감각은 실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30여 년 동안 살아온 나의 얼굴을 알기에 주름을 평탄하게 하고 입가엔 여유를 붙이는 것쯤은 깊은 밤 속에서도 할 수 있다. 그러곤 맞은편의 러너가 나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 속에 진입되면 손의 엄지를 들어준다. 나름 반가움과 힘내라는 무언의 표시다. 때론 나의 이런 의식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대게 고수의 향기가 나를 스쳐간다.- 그냥 미소 혹은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여유가 없어 보이기에 이해한다.- 그럼에도 나와 대칭적 달리기를 하는 사람에게 그 존재가 마치 나 인 것처럼 인사를 해. 수고하고 있다라고. 내가 너를 잘 알고 있다. 신경 쓰고 있다고. 내가 나를 격려해 준다. 일종의 자기 위로인 셈이다. 그럼에도 해본다. 그런 사소한 행동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내가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기준이 너무 높다이다. 기준이라는 것은 내가 세운 나의 중심에 나의 높이라는 것이다. 타인이 보는 시각과는 반대로 나는 나의 기준이 높다고 생각해 본 적이 사실 없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아도 그것이 실제 높은 것인지 낮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뭐 고개를 최대한 위로 꺾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다고 밑동을 잘라 더 낮추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강원도 강릉 장덕리에는 800년 된 은행나무 고목이 있다. 고목 밑에서 나뭇잎을 쳐다보기 위해선 있는 힘껏 고개가 아플 만큼 뒤로 젖혀야 한다. 나의 기준이 그런 느낌일까. 나는 나에게 가학적인 것일까. 나는 나에게 가혹한 것일까. 뭐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기준을 너무나도 오래 보았기에. 나의 고목을 본 이들은 높고도 높다고들 한다. 고개를 들어 본 나 역시 사실 그 끝은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다. 구름을 뚫고 있는 나뭇가지도 보이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얼마큼 기다란 것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내 나무이기에 나도 모를 체념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체념을 오래 하다 보면 그것이 관념이 되고 관념은 나의 속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나의 기준 역시 이제는 관념일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기준이 있는 좋은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기준이 있는 것은 나름 줏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에게는 잘 휘둘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에겐 사시나무처럼 심하게 흔들린다.- 그럼에도 800년 된 고목 같은 기준은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모순적 방종이다. 기준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 같지만 도구의 본 역할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회초리로 이용하는 셈이다. 적당히 해야 하는데 적당히를 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이기에 자를 매로 사용하는 것이다. 글을 쓰거나 운동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심지어 게임을 함에 있어서도 나의 자는 계속해서 나의 엉덩이와 종아리를 매질하고 있다. 가혹하게 가학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에도 첫 문장의 시작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만족하지 못한다. 운동을 할 때에도 내가 닿는 한계치를 끊임없이 깨야한다. 밥을 먹을 때에도 대충 먹을 수가 없다. 요리다운 요리가 없다면 기분이 좋지 않다. 게임을 해도 컴퓨터와 대결을 하는데 내가 지고 있다면 분노감에 휩싸인다. 그 모든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기에 언제나 자책하고 만족이 없는 만족의 끝으로 몰아붙인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는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세대가 매는 사랑이고 관심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겪고 살아본 것 때문일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느 순간 싸늘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는 공기가 없다는 것이 굉장히 차가운 대륙의 바람과도 같았다. 대륙의 바람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 나의 온기를 모두 앗아갔다. 싸늘한 공간 속, 순간의 온기를 찾아 헤맸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온기를 찾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오는 온기는 대륙의 사나운 공기를 스치며 아주 간단하고도 쉽게 식어버렸다.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면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다 끝끝내 빛의 기운을 발견한 듯했다. 그곳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전진했다. 조금이라도 온기가 있는 듯하면 그곳으로 손을 뻗고 집으려 했다. 때로는 온기가 없는 무생물적인 존재 같기도 했고 생명을 다해 불씨가 꺼져버린 온기의 흔적이기도 했다.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듯 한 온기는 마음속에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실제인지 실존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기를 되찾아야겠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알았다. 결국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야겠다는 것으로 귀납논증이 종료되었다.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어야 했다.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를 미워하지는 말아야 했다.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면 나를 더 존중해야 했다. 내가 보는 나는 한 마리의 말과 같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굉장히 사납고 질기디 질긴 성격을 가진 갈색 말. 내가 생각하는 흔한 말의 인상은 갈색이 대다수다. 그만큼 내가 나를 생각할 때 평범함으로 무게를 두는 무의식이 있다. 평범함. 이것이 나에겐 오히려 독이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이다. 무엇이 특별하겠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건방 떨지 마. 실제로 내가 나한테 자주 했던 말들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평범함을 부정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조금 더 칭찬해 주고 돌봐주고 건방 떠는 모습도 자주 보아야 결국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평범하다고 단정 지으면 절대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내가 나를 특별하다고 여겨야 했다.


평범함을 떨쳐내 보기 위해 시시때때로 나를 관찰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것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좋아하는 점 말고. 내가 진짜 나로서 좋아하는 점은 무엇이야.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일까. 아니. 잘하는 것 만 말고. 내가 사랑하면서 적당히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이야. 계속해서 자문했다. 외부에서 오는 것 말고. 정말 내가 내 안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것들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나를 점차 알아가고. 그러다 보니 내가 점차 나와 친해져가고 있었다. 내가 나의 모습을 면밀하게 지켜보는 것이 나름 재미있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주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나 기록으로 저장된 나의 모습들을 자꾸 지켜보게 된다.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거울을 회피한 적도 있었다. 물론 있으면 쳐다보았지만 굳이 나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랄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기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댔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좌절하여 일어서지 못하고 심지어 일으켜주지도 못했을까 싶다.


지금도 물론 훌륭하게 나를 감싸 안고 일으켜주고 토닥여주지는 못한다. 때로는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나 오물 벌레 화살 칼날등을 모두 집어 굳이, 정말 굳이 굳이 나에게 던지고 묻히고 찌르곤 한다. 사실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데 나의 뇌구조는 그렇게 그렇게 돼먹었다. 그것이 위험하고 더럽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그 행동을 해내고야 만다. 나의 바닥과도 가까운 자존감에는 자신이 차지하는 지분이 가장 클 것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나를 인정하는 시작점이었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알고 있어야 그나마 몸에 뭍은 것이 더러운 것인 줄 알고 옷을 벗고 세탁하고 샤워를 할 수 있으며 아픈 것들은 뽑아내고 상처를 소독하고 덮어줄 수 있었다.


그런 나임에도, 나 자신에게 추악한 적일지라도 나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분명한 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죽을 것인가. 아니다. 살 것이기에 그랬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은 필요하지 않지만 내가 나에게 하는 인정만큼은 생이 운명에 의해 종료될 때까지 해주어야겠다 싶었다. 살아가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아니 살아내는 방식을 찾았다. 나는 이렇게 연약한 존재이다. 너무나도 연약해서 이런 것쯤 몰라도 굳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아니라는 것. 혹자는 말한다. 자신을 위로하고 비참하게 보지 말라고. 나는 비웃는다. 그런 삶을 나도 살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이런 삶은 사는 나 역시 나만의 지옥이라고. 결국 나는 나의 나무 밑동을 도끼로 쳐내기 시작했다. 나무는 아파했고 나무는 쓰러질 듯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무의 밑동을 도끼로 도려냈다. 계속해서 도려내다 보니 나무의 정상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지점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만난 것이다. 내가 가진 기준을 낮추니 내가 보였다. 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니 자연스럽게 나는 나를 받아들였다. 나는 나와 친해졌다. 정말로. 진실로.


나는 나에게 사랑받아 마땅하다. 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한다. 나는 나를 인정한다. 나는 나를 인정하고 또 인정한다. 정말 끊임없이 얘기한다. 얘기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품고 있다. 품고 있지 않아도 무의식에 이제는 남아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가는데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이제는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달리기, 글쓰기, 명상 등- 하루를 사는데 불필요했던 짐과 무게를 덜어놓을 수 있다. 내가 나와 친해졌기에 모든 것이 쉬워지고 있다.


분명하게 이제 나는 나를 인정한다. 가슴 깊이 알아가고 싶고 또 알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감정의 싹이 많이도 자라나고 있다. 언젠가는 그 마음에도 꽃이 피겠지. 언젠가는 그 꽃도 시들지만 씨들이 다른 곳으로 떨어져 더 많은 꽃들이 피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마음은 치유받고 사랑으로 가득하고 더 풍족하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또 나를 인정했다. 그렇게 했다. 또 하나의 꽃을 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