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것이 된 나
4년간의 연애. 28살의 결혼. 4년간의 신혼. 그리고 아기의 탄생. 아기는 2022년에 4월에 우리 부부의 곁으로 왔다. 처음 아내가 임신소식을 알려주었을 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응급실 간호사였기에 코로나라는 당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던 질병의 한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고 때로는 생의 끈을 이어드리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 사실 아기가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열망이나 갈망은 생각보다 없었다. 그저 근근이 하루를 살아냈을 뿐. 아기를 가지고자 했던 기간적으로 긴 노력이 존재했지만 4년간의 신혼생활에서 아기는 우리의 곁에 아직은 도착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날 중 하루는 일이 끝나고 퇴근하니 아내는 밝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의 아내는 거의 항상 밝고 명랑한 편이다. - 유난히 밝아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 다른지는 알지 못했다. 난 하루에 대해 아내에게 이것저것 말하던 중 아내는 나에게 줄 것이 있다고 했다.
식탁 위에는 연필 깎기 같은 것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상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때 아내가 최근 나의 고됨을 알고 선물을 주는 것일까 싶었다. 단순한 즐거움에 그칠 작은 선물인 것으로 판단했다. 혹은 내가 전에 샀던 물건이 도착한 것이겠긴 싶기도 했다. 연갈색 상자의 밀봉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고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상자의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기에 무엇인지도 사실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연갈색 상자 속에는 또 다른 반짝이는 상자가 들어있었다. 문득 마트료시카 -흔히 우리가 아는 러시아인형. 인형을 반으로 열면 작은 인형이 있는- 같은 것인가 생각했다. 진짜 선물이구나 싶으면서도 아내에게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무엇일까 궁금한 생각이 한층 더 수면 위로 올라왔다.
보라색인 듯 은색인 듯 연녹색인 듯 빛에 의해 색이 변하던 두 번째 상자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리려던 것이었을까. 마침내 두 번째 상자를 열었을 때 손바닥에 올려놓아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크기의 작은 신발이 있었다. 내가 보지도 못한, 알지도 못하는 크기였기에 인형의 신발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기신발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디작아 손가락에 들어갈 듯한 크기의 신발 위에 작은 초음파사진이 있었다. 초음파기계로 출력된 결과물 -사진- 은 병원에서도 수없이 봐왔기에 윤곽이나 그 안에 음영에 대해선 꽤 많은 지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산부인과에 대한 지식은 적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생각의 끝자락쯤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아기야.' 그 말에는 끝없는 울림이 있었다. 2년 정도가 흐른 지금에도 울림이 있는 것을 느낀다.
아기라니. 아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온다니. 내가 아빠가 된다니. 우리가 부모가 된다니. 한 지점으로 깊숙하게 빨려 들어가는 듯 질문들과 대답의 블랙홀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아내를 내 온몸 가득 안았다. 안다 못해 더 깊숙이 안고 싶어 꽉 끌어안았고 피부로 따듯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의 많은 시도 속에 나의 안에서도 마음에 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애지중지, 10개월간 아내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아기는 무럭무럭 그리고 튼튼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리곤 22년 4월 우리의 곁으로, 우리의 품으로, 우리의 손 안으로 정말 아기가 왔다. 아기가 아내의 몸에 비해 너무 크게 자랐기에 아내는 수술로 아기를 낳아야 했고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아기가 태어났던 병원에선 아빠의 통과의례 같은 '탯줄 절단'은 아쉽게도 없었다. -간호사였기에 정말 자신이 있었는데 뽐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아내의 수술실로 들어가는 마지막 모습을 본 뒤 몇 시간이 지났지만 몇 분 정도 흐른 듯한 시간적 감각만이 있었다. 이윽고 아내의 이름뒤에 아기라는 단어를 붙인 호명이 있었다.
아내는 무사히 건강했고 아기도 다행히 건강하게 세상의 빛을 온전히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신생아실 얇은 유리를 두고 초조한 기다림을 겪었다. 어떤 모습을 띄어야 할지 눈과 입에는 어떤 모양을 해야 할지 표정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손은 서로 맞잡아야 할지 유리를 만져도 될지 다리는 똑바로 서있어야 할지 짝다리를 짚어도 되는 것인지 모든 것이 정확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이기에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것 같다. 그러는 때. 저 멀리서 수많은 바구니 중 딱 하나. 적확하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나의 아기라는 신호도 없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뚜렷한 직감으로 '나에게 온다.'라는 명료한 메시지를 수신받았다. 나의 아기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많은 것들이 페이드아웃-fadeout-됨을 느꼈다. 옆에 있던 다른 부모들은 연극무대의 막이 변환되듯이 다른 곳으로 사려졌고 자신의 아기를 보러 온 다른 산모의 사진 찍던 소리는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더 작아져서 나의 귀에는 어떤 음파로도 수용되지 않았다. 완벽한 밀실이었다. 면밀하게 짜여진 밀실.
아기는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점차점차 아기의 머리카락, 눈, 코, 입, 표정, 입속의 혀까지 세세히 보게 되었다. 나의 아기. 지금도 생각해 보면 단독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만 받은 채 나와 아기가 대면한 하나의 테이크 신을 촬영한 듯하다. 아기를 만났고 나는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쳐다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지만 그 존재는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 나와 아내의 혈육. 이전까지 내가 살아오던 모든 것들이 변화할 것임을 알았다. 나의 아기라는 존재만으로. 분명 나는 아빠가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털들이 삐죽삐죽 자기주장을 해댔고 춥다 못해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이것이 아빠가 되는 감정인가에 대한 몇 초간의 고민이 있었고 이후 다시 세상에서 페이드인 -fadein- 되었다.
그로써 분명하게 나는 아빠가 되었다. 마치 세례를 받은 것처럼 이로써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 아기가 존재함으로써 말이다. 신생아실의 간호사는 나의 아기를 정성스레 들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보여주었다. 나와 닮은 눈매와 아내를 닮은 코, 배가 고픈 듯 짜증을 내는 모습마저 나는 아빠가 되었다는 모든 감각을 제대로 일깨워주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간호사였기에 -아내도 간호사다.- 육아를 생각보다 쉽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흔하디 흔한 산후조리원도 예약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기를 바로 집으로 데려온 것을. 그러나 우리는 부모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아기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총력적으로 아기를 키우는 것 외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다. 우리 부부의 거리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깝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틈사이에 아기라는 존재가 생겨난 후 우리 부부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아내는 아기를 키우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고 나 역시 가정을 유지하는 데에 아기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모든 것에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내 존재 역시 희미해졌다. 희미해지다 못해 세상에 있어 존재 가치가 누락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제대로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알고도 감추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 부부를 실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어른들은 계시지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저 이 육아의 과정을 몸으로 견디고 이겨내고 해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간격이라 그리고 잊힘이라 생각했다. 많은 관계들이 정리되었다. 멀어졌고 또 더 멀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세상엔 나와 아내와 아기만 남겨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집중할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마련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서 우리 부부는 휴직을 했다. 허나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돈만 가지고는 사실 살아갈 수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기불황까지 겹쳐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돈의 절반이상은 전세이자비용으로 삭제당했다. 그러기에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고 낮에는 아기를 보고 밤에는 일하고 2가지에서 4가지 일까지도 했던 기형적인 시기가 있었다. 아침 6시와 7시 그쯤 어딘가부터 시작되는 하루의 일과는 밤 10시까지 도달하였다. 간호사 일을 하게 되면 오후 8시에 나가 아침 7시쯤 들어오는 반복이었고 또 그렇게 하루는 종료되다 시작되었다. 하루 그 자체가 수없는 반복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누적되고 쌓였다. 산기슭에 존재하는 많은 흙과 모래 돌들이 물살에 쓸려내려와 강 하구에 누적되어 물길을 만들 듯이 우리 세 가족의 길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1년 8개월이 지났고 아기는 21개월에 접어들었다. 현재 아기는 제법 인간다워진 모습을 보여준다. 감정이 다양해졌다는 것이 그 증거다. 슬픔은 슬픔으로 -이것은 정말 제대로 표현한다.-, 기쁨은 웃음으로, 혼이 나면 민망함으로 정말 인간다워지고 있는 것을 시시각각 목격하고 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부부가 우리 부부의 모든 것을 다해 키웠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아기가 곁으로 오기 전 가지고 있던 삶의 양식은 모두 버리고 새롭게 아기만을 위한 구조 그리고 양식을 모두 생성하고 정착하고 적응했다. 나의 하루는 아기로 시작해서 아기로 끝나며 생각의 시작점과 끝은 모두 나의 아기로 귀결된다.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나의 삶의 파트 1에서 파트 2로 접어드는 순간이라고 생각된다. 아기를 키우면서 크게 바뀐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지금의 내가 정말 많이 부족하다는 것,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만 하는 것,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 그리고 더 건강해져야겠다는 것 그리고 아빠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먹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는 신생아를 우리 부부가 사는 공간으로 데려와 기고 걷기를 시작하는 영아를 지나, 말을 시작하고 감정이 다양해지는 유아를 거쳐 청소년기 성년기까지 모든 시간을 내어주는 육아. 아빠가 된다는 것은 결국 아기와 같이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로써 오는 책임감의 무게를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는 것일까.
2022년을 기준으로 나의 삶 모든 것이 바뀌었다. 큰 고통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지만 결국에 현재 남은 주된 감정은 행복이다. 다시 돌아보아도 고통이 크게 보이거나 슬픔이 지배적인 기억의 저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그랬었지.', '그때 힘들었지만 이렇게 잘 컸네.' 같은 좋은 감정의 기억을 남아있다. 나는 오늘도 아기를 보고 아빠라는 것에 충실한다. 아기의 밥을 챙겨주고 먹고 싶지 않으면 강요하지 않고 내가 놀아줄 수 있는 몸으로 마음껏 장난치고 웃게 해 주며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먹고 싶은 간식들도 챙겨주고 청결을 위해 음식이 뭍은 손은 제때 닦고 입가의 음식조각들도 세수를 해주며 치워준다. 옷도 춥지 않은지 덥지 않은지 계속해서 확인하여 덥다면 옷을 조금 얇은 것으로 갈아입히고 춥게 느껴진다면 조끼를 입히거나 양말을 신겨준다. 낮에 잠이 온다면 그것을 잘 파악하여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 아닌 순응할 수 있도록 잠자리로 유도하고 편안하게 낮잠을 재워준다. 아기가 낮잠에 들면 난장판이었던 집을 아내와 같이 정리한다. 책, 장난감, 설거지, 바닥청소, 화장실정리, 빨래 모두 진행한다. 그러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밤잠까지 동일하게 아이를 챙겨주고 보조해 주고 열심을 다해 살아간다.
아빠라는 것이 된 나는 무엇일까 고민해보곤 한다. 30여 년 살아온 나일까. 아니면 지금의 모습인 '아빠'라는 또 다른 나일까. 그런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저 충실하는 것. 사실 우리 부부가 혼신을 다해 아기를 키웠지만 냉정하게 돌아보자면 아기는 스스로 잘 크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놀 것을 찾기도 하고 스스로 말을 따라 하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도 스스로 정하고 보고 싶은 것도 스스로 판단하고 정한다. 이렇게도 어린 나이에도 말이다. 아빠라는 것은 앞장서서 원하는 길을 당겨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그저 아기가 스스로 길을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바라봐 주는 것. 그저 사랑을 주는 존재. 그렇다면 '아빠'라는 타이틀이 나를 소개하는데 더 적합한 인사일 것이다.
아빠가 된 후 나의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나이가 들고 들어 내가 더 약해졌을 때. 나의 딸아이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하고 딸아이의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는 아빠가 되는 것. 그런 모습을 위해서라면 아빠로서의 삶 그리고 나로서의 삶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맹렬하게 살아가야겠다 싶다. 그렇게 하면 딸아이가 나의 늙은 모습에도 나와 같이 있어주게 될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부부는 딸을 가진 부모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떻게든 그런 삶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변화는 뼈아팠다. 그럼에도 지금의 삶을 사랑한다. 사랑을 하는 존재가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아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