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둘, 나의 깊은 심연

my deep and blue

by 지우

고요하게 보이는 깊숙한 심연 속에 '무엇'인가 있다. 모르는 척하고 싶지만 그 존재는 거대하여 무시하기엔 내가 너무도 미약하다. 심연의 '무엇'이라는 것은 이따금 감정의 수면 위로 올라와 무자비하게 돌아다니며 신체 모든 곳을 들쑤시고 또 헤집고 다닌다. 헤집고 다니며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마치 십자군 전쟁에서 알라의 수호자를 자처한 자들에게 무참히 패배한 십자군의 깃발과도 같다. 유일신을 대변한 십자군이지만 그 깃발은 훼손되고 또 훼손된다. 능멸되고 조롱된다. '무엇' 역시 나의 머릿속을 훼손하고 엉망진창을 만든다. 내가 쌓아온 감정과 생각의 회로들을 무시한 채 무법적으로 돌아다니며 파괴한다. 살아있다는 영구적일 것 같은 감각이 자신을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고 지치며 그로써 모든 삶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무결의 그로기 -groggy- 상태가 된다. 입은 굳게 걸어 잠겨져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어떤 소리도 제대로 된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뇌 역시 과음을 한 것처럼 전두엽과 소뇌의 기능이 상실되 격앙되고 흥분된 반응이 나오곤 한다. 삶에 대한 가드를 심하게 올린 채 상대를 향한 잽조차 날려볼 생각도 못한다. 그럴 때면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 속 바다 깊은 곳, 심연의 괴물이라고 -크라켄 같은 것.- 생각해 버린다. ‘무엇’인가가 ‘괴물’이라는 정의가 내려져야 스스로가 나를 이해할 수가 있다. 결국 ‘나’이기 때문에. 내가 만든 것이라는 걸 잊고 싶지만 ‘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이기에 부정은 절대적으로 불가한 것이다. 회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이다. 직면해야만 한다.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대해야 한다. 적적하게 대응한다면 ‘괴물’녀석도 심하게 난장판을 피우지 않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곤 한다. 작년, '심연의 괴물'을 달래 놓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가 생겨 피가 나고 고름이 차고 썩어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상처에 피가 나면 닦았고 제대로 아물지 않아 고름이 차면 안 나올 때까지 짜냈고 썩어낸 부위는 도려냈다. 자세히 본다면 긍정적인 면도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긴 ‘괴물’이지만 문제는 녀석이 얼굴을 들고 올라오는 날엔 온전하게 제자리에 있던 모든 삶의 굴레가 파괴된다. 참담하다 못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삶을 이끌어가던 표지판들은 무너진다. 매우 무기력하다. 몸에 힘이 나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사람이 아닌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격은 무너지고 부서진다. 그러던 중 불현듯 올라오는 이 '괴물'녀석을 보다 보니 어떤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줄 알았다. 더 자세히 살펴보고 면밀히 보니 결국 '내가 던져 준 먹이'였다. 결국 움직이게 만든 것도 ‘나’였다. 그 누구한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 이렇게 자라왔는지도 왜 나의 마음속에 정착되었는지도 묻고 답해줄 대상도 없다. 탓할 것도 나뿐이다. 스스로 감당해야지 감당해야지 하며 달랠 뿐. 그런데 감당해야, 감당해야지 하지만 그 무게가 너무 크다고 인지될 때가 무척이나 무섭다. 두렵다. 무게감은 나를 절묘한 두려움에 빠뜨렸다. ‘이 무게를 내가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 만 같아.’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많이 무서웠다. 내가 나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어디에 맡겨둘 수도 없고 어떻게 떨어트릴 수 없는 갈팡질망의 연속이었다. 매번 거미줄처럼 연결된 100가지의 외나무다리에 서서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조심스레 절박하게 발을 내디뎠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삶의 많은 것들을 떨어뜨리고 왔다. 어떤 길은 너무 좁아서 손에 쥐어진 여러 관계들을 버려야 했다. 또 어떤 길은 얇고 썩은 나무로 되어있어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일들을 자의로 떨어뜨려야 했다. 그것이 옳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그릇된 선택을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렇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보면 중간중간 손을 뻗는 이가 있었다.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그러나 결국 혼자 건너야 하는 다리이기에 사람에게 기댈 수가 없었다. 기대려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적이 있다. 그때는 세상이 떠나갈 만큼 후회했다. 가족이라는 것에 기대어 보려 했던 것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가족이라는 명확한 무리에 안정을 찾고자 한 내가 잘못이었다. 결국엔 말이 문제다. 말하지 말걸 그랬다. 잠시 좋은 꿈을 꾸었나 보다. 내가 다른 길을 보고는 그 길이 내 길이 다라고 잠시 착각을 했나 보다. 가족이라고 내가 기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 내가 우매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결국 나는 나이기에 나 이외에는 모두가 타인이고 내 주변의 여러 인물들과의 문제에 있어 구심점이 되는 것은 나.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라는 자문도 계속해서 날린다. 마치 답장이 오지 않은 지역 혹은 나라로 이사를 떠난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느낌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외나무다리들을 바라본다.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생각하니, 깊은 곳 아래 괴물을 맞닥뜨릴 생각을 하니 고요히 막막하다. 잠시 깜깜해졌다. 나의 세상이. 고요한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당시의 모습 같아 조금은 두렵기도 했고 추웠다. 쓸쓸했고 고독했고 정신 사나웠고 쉬고 싶었고 잠시 떠나 있고 싶었고 잠이 오지만 잠을 자기 싫었고 잠을 자기 싫지만 잠만 잤고 생각도 싫었고 생각하기도 싫었고 갇혀 있기 싫었고 움직이기 싫었고 배도 고프지 않고 좋아하는 커피도 먹기 싫었고 심심하면 집어 먹던 과자도 먹기 싫고 책도 눈에 안 들어고 생산적인 활동도 하기 싫고 삶을 등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이 들고 그냥 잠에 들까 싶었는데 잠도 잘 수 없고 모든 것이 아닌 것. 그게 나의 깊은 심연 속 괴물. 잠시 그런 생각에 젖어 실제 세상으로 와보니 어느 산책로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물에 젖은 수건처럼 널려져 야외의자에 앉아 있다가 집에 와서 해야만 하는 일들을 했다. 마룻바닥 청소도 하고 딸아이와 거품목욕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주고 몸이 너무 뻐근해 전신 스트레칭을 하며 이렇게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달리기를 조금 하고 와 적당한 온도의 물로 샤워를 했다.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듯하다. 글을 쓰는 것도 오늘은 ‘오늘만 견뎌내 보고 들어가 있자.’라고 생각해서 쓰는 것이다. '괴물'을 여기에 다시 봉인하려고. 봉인해 두어야 내일은 또 같은 리듬으로 돌아가겠다 싶어서. 살아가야 하니 어쩔 수가 없다. 달래야지. 뭐 이런 일들이 한두 번 더 있다 보면 그다음에는 생을 조금이라도 묵묵하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가두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나'이니까- 너를 가두어놔야 내가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 미안하지만 너무 틀어막지 않을 테니까 평소에는 잠잠히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머물러주었으면 좋겠어.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것이 나름 힘들거든. 내가 먹이를 던져주는 것, 이해해. 내가 한 거이니까. 그리고 너는 나니까. 그래도 정말이지 지치고 피곤해 너란 녀석. 물론 너도 답답하겠지.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을 테니까. 기댈 곳도 없다는 것을 너는 몸소 경험했으니까. 근데 어쩌겠니. 우리가 그런 것을. 그래도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그래도 지금까지 잘 있어주었잖아. 그리고 나에겐 가정이 있잖아. 사랑하는 와이프와 딸이 있잖아.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그래도 오늘은 너무 많이 부시지 않아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점차 점차 고통이 비교적 약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부탁인데 잠시 또 잘 내려가있어 주렴. 나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너와 계속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거든. 너무 힘들면 올라와. 그땐 지상에서 내가 감당해 볼게. 그땐 어쩔 수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볼게. 고생했네.


푹 쉬렴. 나의 심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