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나, 어떤 것에도 하루키

사랑하는 작가가 있다는 축복

by 지우

은유와 불확실성의 특별성.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님의 -이하 하루키- 책 속에서 체득한 것이다. '소설에 교훈이랄 게 있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게 하루키소설은 단순히 작품이라는 것에 국한되고 창조된 세계만은 아니었다. 하루키의 소설 속 문장을 구성하는 글은 나를 역동적이고 활동적이게 만들었으며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은유를 읽어가는 삶은 풍족하게 느껴진다. 은유라는 무한한 확장성의 세계는 나 역시 확장시킨다. 그리고 나를 확장시키는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불확실성만큼 생을 담대하게 살아갈 근거는 없다. 확실하다는 것은 생각에 불과하다. 불확실하기에 뛰어드는 것이고 더 대담해지는 것이다. 불확실하기에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확실한 삶이었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피폐해졌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삶을 만들어 나가고 생을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배우고 습득했다. 학교와 학원에서 배운 것보다 성인이 되어 하루키의 책을 보고 느끼는 순간에 성장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아마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깊이 사랑하는 것 같다.






독서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해군에 입대하면서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전역 전까지 책 100권 읽기. 누구도 제시하지 않았고 아무도 권유하지 않았다. 입대하면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간단한 생각에 명료하게 결정지었다. 2010년 기준 군 월급은 이병이 7만 원, 병장은 10만 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작은 돈이었지만 내게는 충분한 책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한 달에 받는 월급 중 절반정도를 책을 위해 따로 보관했다. 그리고 외출이나 휴가 때 모았던 돈들을 책에 몽땅 부어버렸다. 군시절에 항상 기록을 하던 수첩이 있었는데 독서기록을 90권쯤 기록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요리, 인문, 과학, 소설 등 잡다하게 읽었다. 독서에 해당한다 싶으면 일단 읽었던 것 같다. -전역 때는 해당 중대에 모두 두고 나왔다.-


왜 책을 그렇게 읽었을까. 추측건대 아버지가 굉장한 독서가다. 집에는 항상 책이 가득 차다 못해 쌓여있는 책장이 몇 개나 있었다. 거실. 내 방. 안 방. 아버지의 사무실마저 책냄새로 가득했다. 책냄새란 질긴 종이들이 서로의 숨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냄새다. 종이들이 서로 엮이고 엮여 종이 사이사이의 습도가 쌓이고 쌓인 냄새. 답답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흥미롭지 않은 향. 항상 그런 향이 존재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상 시간이 나면 책을 손에 쥐고 계셨다. 아버지에겐 소파란 티비를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책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것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책을 접했다. 책을 읽는 사람을 자주 보았고 책이라는 물질 자체도 눈에 많이 담겼다.


그러나 남자학생이라면 학창 시절 흔히들 겪는 운동과민증후군 -내가 지은 증후군 이름이다.-으로 친구 한 명이 뛰면 모두가 뛰고 부딪히면 부딪혀야 했다. 남자의 정글이었다. 축구공이 보이면 다 같이 하나의 공을 향해 돌진하고 농구공이 튀기는 청아한 소리가 들리면 림으로 돌진했다. -나는 남중남고출신이다. 그것이 때론 이상하게도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정글 안에선 책은 '따위'에 불과했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던져지는 물건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활하던 정글에는 앉아있는 것, 그것은 죄악이었다. 넘치는 에너지를 자신도,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다. 분출하기에 바빴고 분출하느라 시간이 무던히 그리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책을 읽기엔 당시의 삶은 너무나도 바쁘게 성장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잔상 때문인지 독서에 유익성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독서보단 공부를 더 역하게 느꼈기에 집에서 공부를 할지언정 책을 보는 척도 했었다. 과거의 그러한 많은 점들이 모여 군복무동안 인생의 첫 독서시대를 가지게 된 것 아닐까 싶다. 군대를 전역하고도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심심치 않게 읽었다. - 기록은 없다. 놀라운 허구일지도.- 그러나 대학교를 복학하면서는 사회진출을 향해 전공서적만 보다 보니 다시 독서와 멀어졌었다. 다시 책과 멀어진 지 10년 정도. 나와 배우자사이의 아기가 태어나면서 인생 두 번째 독서혁명이 일어났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생긴 여유시간에 나의 눈은 책으로 돌진했다. 아마 나의 삶은 하늘에서 불현듯 떨어지는 유성과 같이 계획하지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이상하게도 옳은 방향으로 떨어지는 듯하다. '책 좀 읽어야겠어.'라는 무의식이 오랜만에 눈을 뜨고 말을 전했다. 아기를 키우며 시간이 나는 순간마다 아이패드를 집어 들고 밀리의 서재를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고전문학을 읽어댔다. -고전이어도 재미있어야 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햄릿은 아직 내가 읽을 수준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 F. 피츠헤럴드, 헤르만 헤세, 도스트옙스키,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등. 고전문학 중 첫 문장을 읽었을 때 거부감이 없으면 끝까지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댔다. 문학의 세계에서 정처 없이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느새 일본까지 도착했었다.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류 그리고 현 종착역인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아직은 현시대에 하루키의 소설이 고전이라고 볼 수 없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도 그럴 것이고. 그럼에도 나는 하루키의 소설의 흐름과 문체에 흠뻑 적셔지고 말았다. 당시 읽었던 첫 소설은 역시는 역시인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정말 뗄 수가 없었다. 아기가 우는 것을 늦게 인지했을 때도 있었다. -몇 초정도- 소설을 읽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실제 시간의 왜곡 같은 경험까지 했었던 것이다. 정말 엄청났다.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소설 속 세계에 있는 것을 경험했다. 주인공이 걷는 일본의 역간거리를 걸었으며, 인물의 시선 옆에서 같이 간단한 채소 요리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소설 안에도 나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 속 계절에 따른 나뭇잎의 변화를 느끼고. 턴테이블에 올리는 LP도 같이 골랐다. 아마 클래식을 듣고 위스키도 손가락 한마디 정도 마셨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는 마치 인셉션 당한 듯했다.


이후 하루키의 소설을 모두 소장하기로 결심했다. 소장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다. 지금은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1Q84'까지 소장 중이다. 최근에 발간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까지 올해 안에 소장하게 될 듯하다. 첫 작품부터 정주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따금 다시 돌아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1973년의 핀볼.'을 읽는 것도 즐긴다. -하루키의 초기작은 은유와 불확실성에 대한 절정에 있는 작품이라 느껴진다.- 단순히 소장욕이 아니다. 손이 닿는 곳에 하루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루키소설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다른 소설가의 작품이 손에 잘 안 잡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읽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있다는 삶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그것은 축복과도 다름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누구가 대신 경험하지 못할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만끽하고자 한다.


축복받은 삶, 그것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책 속에, 맞잡은 나의 배우자 손에도 존재한다. 나는 사랑하는 작가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아이 역시 나의 옆에서 어여쁘게 성장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단 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깊이가 존재한다. 그것을 누가 대신 경험해 주고 판단해 줄 수 없는 나만의 축복받은 세계인 것이다. 사랑이 존재하는 삶은 정말이지 축복이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삶은 나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사랑은 축복이 맞다.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작가가 있는 삶을 산다. 하루키의 책들은 나의 책상 위에 꽤 높게도 쌓여있다. 나의 오른팔의 상완골의 길이를 훌쩍 넘는 것 같다. 단순하게 쌓인 책을 보고 있음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정말로 행복이라는 것이 단순한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싹터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어느 순간이든 행복하고 즐거움이 가득해진다. 멍청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감정은 확실한 것이다. 확실하게 느낀다. 나는 하루키라는 작가를 굉장히 사랑하고 있다.


하루키는 독서라는 것에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서 다른 작가들의 책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새로운 별을 보고 그 별만 바라보며 맹렬히 쫓을지도 모른다. 혹은 하루키가 나의 종착점 일지라도 평생을 이분의 작품만 보고 살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얘기다. 많은 가능성이 나의 눈앞에 존재하는 세상이고 나는 모든 가능성들을 받아들인다. 실로 문학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나에겐 아무리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책을 보아도 용기가 생겨나거나 하고자 하는 것에 나아갈 힘을 얻어본 적은 없다. 나는 그러한 힘을 하루키의 책에서 찾은 것이다. 문학이라는 어떻게 보면 허구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문학의 힘을 믿는다. 종교처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닌 위로와 위안을 얻고 방식을 체득했다. 때로는 은유적 표현은 굉장히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를 때가 있다. 이런 내용이 왜 등장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문학의 깊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연결고리를 독자가 파악하고 연결하는 것. 저자가 글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둔 것이 은유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하루키의 은유의 방에서 수많은 것을 얻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문적이고 원리적인 책들 역시 엄청난 지식의 우물이다. 그러나 그런 책에서 '나'를 만드는 방법은 있겠지만 실제의 현재의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나'라는 것은 내가 정의해야 생명력을 얻고 행동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얻는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외부의 그 어떠한 것보다 나 자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나에게 그러한 존재다. 자신의 글로 누군가의 삶을 위로해 준 사람. 힘든 시기에도 문학 속에 있게 해 주었고 글 속에서 힘을 얻었다. 힘들 때 하루키의 책을 들 수 있는 생각이 주어졌고 나는 그것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다. 강한 의미부여일 수 있지만 하루키에 대한 나의 의미는 막중하게도 무겁다. 내 눈에는 항상 하루키의 책이 있다. 어디든 놓여있고 어디든 손을 뻗는 곳에 존재한다. 나의 삶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항상 그 책을 보고 기분 좋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어느 한 나라의 작가를 사랑하고 그의 문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다.'라고 하는 것 외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열렬히 사랑한다. 축복받고 있고 축복은 끝없이 이어진다. 나 역시 그 안에서 받은 축복의 감정을 나만이 간직하는 것이 아닌 긍정적인 회로를 통해 다른 곳으로 배출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하루키는 나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사랑하는 작가가 있다는 삶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