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들과 함께 살기
전심을 다해 후회하지 않으리. 후회에겐 여지를 주지 않으리. 후회를 바라보는 인생의 시간은 아깝다고 여기리라. 지나갈 행복들이 안타까워 후회를 자제한다. 문득 열심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나를 불태울 만큼은 아니지만 ‘열심’이라는 것은 기로에 서있는 나에게 긍정적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도와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다. 잠시 누군가를 도와주더라도. 잠시 머물고 떠날 곳이더라도. 얼마나 볼지도 모를 사람에게도. 스쳐 지나가며 도움을 주는 어떤 이에게도. 열심이라는 것은 나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말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나의 인생사, 행복은 우선이 아니었다. 쾌락적인 것에 발을 들였지만 온전하게 행복감을 남겨주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은 정말 정말로 적다. 너무 적어서 언제 삶이 시작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유치원 시절 선생님 혹은 옆에 앉아있던 친구들의 모습을 기억하곤 한다. 오래전 사진을 보고 표현하듯이 머릿속 기억이라는 창고에서 편하게 꺼내어 보여주곤 한다. 그런데 나는 수많은 기억 중 행복의 기억은 잘 떠올리질 못한다.
나는 그것이 없다. 그것이라는 것은 기억이고 없다는 것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슬프지는 않지만 씁쓸할 때가 있다. 아니 슬픈 것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굉장히 슬픈 감정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과거의 기억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할복割腹같은 것이라 느껴지곤 한다. 내가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예견된 일일수도 있다. 분명하게 행복의 기억이 남겨져 있을 텐데 그것을 끄집어 내지를 못한다. 내가 듣고 생각한 그리고 경험했을 유년에는 잘못된 것이 없었을 텐데. 나의 학창 시절은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딱 하나, 기억만 없다. 감정은 존재하는 듯하다. 매우 희미하게.
과거 사진을 보고 뇌에서 영사될 수 있는 장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에게 유년시절의 기억이란 게 그렇다. 부모님께서 정리해 둔 사진첩에 사진과 그날의 기억을 부모님께 전해 들어 연출된 연극같이 느껴진다. 블록 쌓기처럼 혹은 소설처럼 무엇인가에 의해 나의 이야기(기억이라는 것)가 구성되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라지만 매우 이질감이 든다. 이게 나의 실존하는 기억일까. 내가 만들어낸 기억일까. 실제 뇌의 저장소에 남아있는 장면 같지는 않아서 이질감이 들 때도 있다. 어느 날 오른팔과 왼팔이 다르게 느껴진다. 내 것인지 의심이 되어 오른팔로 왼팔을 만져본다. 무디다. 다음엔 왼팔로 오른팔을 만져본다. 역시나 무디다. 같은 무딤에도 분명하게 둘은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명확한 이질감이다. 그런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대학교 1학년 기억마저도 가물가물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을 보며 달려가고 있다. 나의 나이도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간다. 기억이라는 것 마지막지점이 점점 더 현생과 가까워지는 기분도 든다. 예를 들면 지금의 기록이 1년 후엔 잊힐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쾌하진 않지만 오묘하고 뇌에 이상이 생긴 사람인 것처럼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싶다. 때로는 조발성 치매인가 의심할 때가 있다. - 냉장고에 리모컨을 넣지 않는 것으로 봐선 아직은 진단받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기억과의 공존은 나와는 무관한 일 같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은 아니다. 참 아이러니하다. 급하게 일해야 했던 환경에서 중요사안들을 잊어 문제가 되거나 한 적도 없다. - 응급실 간호사로 2차 병원에서 7년간 일했었다. 다행히도 기억의 문제로 환자 생명에 지장을 준 적은 없다. - 집안의 대소사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중요한 일들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위했던,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나의 두 개의 저장소가 있는데 단기적인 것은 활발하게 하나의 저장소를 활용하나 다른 저장소는 쓰레기통처럼 사용되나 싶다. 소각燒却 대상인 것이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때로는 굉장히 비극적이다. 마치 불온한 유년기를 보낸 듯하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매끄럽지는 않지만 사랑받았다는 감각은 충분한데 말이다. 걸어 잠겨진 기억의 뭉치를 어떻게든 하여 개방하거나 지금부터의 기억만큼은 부디 보일 수 있는 곳에 두고 싶었다. 그러기에 매 순간 긍정적인 것을 하고 찰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년간의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면 그것보다 더 많은 빈도수에 노출시켜 저장될 수 있는 횟수를 늘려보고자 했다. 사실 그것은 발버둥에 가깝다.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인데 발버둥 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의 처지와 같은 것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10분마다 기억을 잃는다. 잊기 않기 위해 온몸 가득 문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일기를 쓰고 일지를 쓴다. 어떻게든 남기려는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남아야 한다. 일상의 외출에도 사진기를 가지고 나간다. 별 것 아닌 길 위에서 사진기를 켠다. 그리고 포착한다. 내가 나라는 것을 잊기 않기 위해, 내가 나를 위해 기억을 만들어 주어 찰나를 잡아채고 있다. 누구도 아니고 '나'이기에 찰나를 잡는 것이 나에게 온전히 해줄 수 있는 행동과 태도인 것이다.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남기고 싶어 사진첩을 보다 보면 뜬금없는 사진들이 존재한다. 남아있다. 그렇게 하나 둘 어디서든 남긴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는 감각이 존재한다.
나의 신체근육이 건강한 이 순간에 두 다리를 통해 바깥을 탐색한다. 그 모습을, 순간을 내 무의식에 담고 또 담는다. 책을 읽으며 정신의 근육을 건강하게 만든다. 정신의 힘이 강해질수록 제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전자기기등을 끊기에는 너무나 어렵지만 의식적으로 떨어뜨려 놓고 디지털 디톡스를 시행한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를 얻고 있기에 무의미한 공간을 내어주지 않기 위함이다. 무념의 상태로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잠시 세상에서 멀어지게 해주곤 한다. 결국 모두 뇌를 쉬게 해 주는 행위다. 조금이라도 순간을 나에게 담기 위해서 말이다.
찰나에 순간은 내가 가진 물리적인 두 손으로 절대 잡을 수가 없다. 잡아다가 새장 같은 곳에 가둬두고 밥이나 물 따위를 주며 기를 수도 없다. 그것을 보며 좋아 보이는구나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결국 노력뿐이다. 기억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기억이 된다. 계속해서 노력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현재의 시간 역시 별것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책상 위에는 쳇베이커의 LP가 한 장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제주도 면세점에서 구매한 글렌피딕 18년산 싱글몰트 위스키 1/3과 친형이 미국을 가며 남긴 발렌타인 블랜드 스카치위스키가 하나 있다. 그 앞에는 최근 선물 받은 러시의 카마 바디크림이 있는데 와이프가 이 향을 지극히도 꺼려한다. 사실 나는 그 향이 썩 마음에 차기에 샤워 후에는 꼭 바른다. 텍스쳐가 고른 크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뻑뻑한 땅콩크림 같지는 않다. 책상 끝엔 벽돌들처럼 읽어왔던 책들이 놓여 있다. 대략 30권 정도. 책장이 없어 서로가 서로를 기대고 지탱하여 쌓아져 있다. 노르웨이의 숲 위에는 반딧불이가 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위에는 파리리뷰의 책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모으고 있어 첫 작품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최근에 구매한 '1Q84' 전권까지 모두 어우러지게 쌓여있다. 하루키의 책만 20권 이상이다. 하루키의 단편 장편 가리지 않고 에세이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하루키가 그렇게 좋다는 뜻일 것이다. 카마크림 옆엔 2024년의 1월 달력이 있고 메모해 놓은 이달의 일정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라고 말해주고 있다. 1월엔 아직 큰 대소사가 없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신 할머니가 생각나기는 한다. 언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2024년의 1월엔 눈물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온다. 오른편에는 작은 전등이 있는데 와이프와 결혼하기 전 내가 좋아할 것 같아 홍대 근처에서 구매해 나에게 주었다. 수제로 만들어진 전등인데 수제여서 그런지 발화하는 빛이 눈에 불편하리만큼 강하다. 마음이 썩 드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에 집중하거나 차분해지기 위해 의식적으로 키는 것으로 봐서는 꽤나 도움 되는 것 같다. 눈을 들면 꽤나 큰 창문이 있는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좋지 않은지 낮시간임에도 새벽녘의 방처럼 시야가 뿌옇다. 이런 하늘에도 온도는 겨울치곤 심하게 낮지 않아서 왠지 마스크를 쓰고 달리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딸아이와 아내는 안방에서 곤히 자고 있다. 딸아이의 낮잠시간이다. 요즘에는 자기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욕구가 생겼는지 모든 것이 싫다고 한다. 흔히들 이 시기를 '아니 싫어 병'이라고 일컫는다. 심지어 기저귀도 갈지 않는댄다. 소변이 가득 차서 무겁다고 불편하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모든 것을 이제는 스스로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나 보다. 새삼 아기가 많이 컸음에 놀라움이 있으면서도 점점 더 부모인 나와 아내의 손길을 거부할까 서럽기도 하다. 이런 틈을 타 자고 있는 모습을 몰래 가서 지켜보곤 한다. 둘 사이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저 침대 위에는 온기가 가득한 사랑으로 따듯하다. 꼭 그것을 촉감적으로 느끼지 않아도 시각적인 온기가 느껴진다. 오늘은 아침에 퇴근하여 아내와 딸아이의 아침을 챙겨주고 조금 졸린 것 같아 잠을 더 보충했다. 일어나 보니 오전 11시 30분이었고 이제 슬슬 오늘의 삶을 이어나갈까 한다.
이쯤이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작은 요소들을 지켜본다. 세세히 나의 머릿속에 글로 풀어본다. 내가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 말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저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기억의 존재감이 없는 채 살았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노력을 해야 한다. 세상을 글로 본다. 내가 풀이해 놓은 글이 사방천지에 존재한다. 그날일 수도 있고 저 날일 수도 있다. 힘들었을 수도 있고 행복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나의 공존하는 시간과 그리고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기로 한다. 습관적 노력으로 기억과 같이 걸어가고 있다. 만들어진 기억보다는 정말 내가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기록하여 기억한다.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이라는 허망하고 지나치게 비약적인 꿈을 꾸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찰나가 가지고 있는 속성만 마음에 저장할 뿐이다. 그것이면 됐다고 느낀다. 그렇게 나는 찰나, 그리고 지나간 것들과 같이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