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그러나 모두들 쉽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듣는 것이다. 상충되는 이야기이지만 누군가에게 가장 쉬운 일, 다른 누군가에겐 자신도 모르게 전혀 하지 못하는 일 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개의 귀를 가지고 태어난다. 두 개의 귀를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듣고 판단하고 배워나간다. 두 귀가 없다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주는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다. 파악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듣는 방법을 분명 잊어가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송두리째 앗아간 것 마냥 두 귀의 기능을 잊어버렸다. 두 귀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듯 어떠한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고대시대를 훌쩍 넘어 더욱 과거에 인류가 타인과의 공존을 선택한 그 시점.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부여되었을 때 아마 듣기 위해 생존했을 것이고 들었기에 생존했을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라는 책에서 그 증거를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고대 그 이전의 시대에선 사람의 삶이란 '생존'뿐이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생존으로 귀결된다. 척박하고 개척되지 않은 자연에서 인간은 바람보다도 약한 존재였다. '죽음'의 실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생존'을 해낸 자들의 삶의 방식이 담긴 이야기는 후손 혹은 동료에게 전달되고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뒤 올바른 생존방식을 누적하고 익힌 자들은 죽음이라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듣는다는 것 자체가 생존과 직결되어 있던 것이다.
현시대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달라졌다. 현대시대의 귀의 역할은 자신을 위한 것 외 더 폭넓은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하는 것만 들으며- 음악이든 콘텐츠든 잔소리든 옳은 소리 든-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가급적 차단하려 노력한다. 좋게 해석하자면 자신의 소리에만 집중한다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 자가격리적 음파 차단은 세상의 소리를 소음으로 몰아간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 이외엔 모두 소음으로 배척하고 있는 형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이 없는 이어폰을 넘어 헤드셋을 쓰고 노이즈캔슬링의 기능까지도 사용한다. 바깥소리는 모두 소음이고 그 소음을 취소, 차단한다는 것이다. 두 귀에 들어오는 모든 외부적인 소리를 차단하기 총력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귀는 퇴화하고 있는 것일까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나는 퇴화에 무게가 더 실린다. 인공적인 소리를 듣는 것이 태생적 귀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생존을 위한 이야기를 듣고 서로 공유하고 전달하고 습득하기 위한 귀였을 텐데 말이다. 지금은 왜 이렇게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배척하고 있는 퇴화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과거에 비해 생존의 위협이 적은 시대이기에 그럴 것이다. 현시대, '생존'이라는 키워드는 모두에게 절박하고 절실히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이 아닌 시대다. 삶이라는 것에 생존은 무의식적에 가까운, 기본값일 뿐인 시대다. 죽음은 가깝지 않게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국가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우리나라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것을 학습받았지만 나 역시 전쟁과 연관된 살벌한 죽음은 진실로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 같다. 살아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듣는다는 것을 진화학적으로 퇴화를 하는 수순에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듣는다는 것은 보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들을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보석은 주변에, 사방천지에 흐트러져 있다. 광석 속 보석일 수 있고 보석 자체일 수도 있고 보석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충분히. 듣는다는 것에는 큰 장점이 있다. 일단 사람을 얻을 수 있다. 들음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적 기능만으로도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진실로. 듣지 못하기에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에 고립되는 세상이다. 진실로 들음을 이행하고 수행할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듣는다.'라는 것에는 다른 숨겨진 것이 있다. 두 귀는 단순하게 소리라는 음파를 수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실제적으로 음파를 이해하고 깊이 받아들이 수 있는 다른 기관. -실제 해부학적으로 기관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사실 조금은 진부한 문장이다. 과거 속에서 산화된 문장일 수 있다. 그럼에도 두 귀로 들어온 음파를 내가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들음이라고 생각한다. 듣는다는 것이 귀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마음이 향한 상태로 시작되어야 진정한 '들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귀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다. 경험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정말 소중히 생각하는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 관계에 있어서 단순하게 귀만 이용한 것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을 듣고 전달해 보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평생 같이 살아오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설 때 강아지에게 건네었던 말. 나를 길러주시고 챙겨주시고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나눈 흐릿한 대화. 결혼식에서 나를 진하게 안아주던 부모님의 품속 대화. 이런 귀중한 경험에서 나오고 오가는 언어는 단순하게 귀와 입만이 이용된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마음으로 이어져있는 진정한 들음이고 교류고 그것이 진실된 관계였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진실로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것을 간호사라는 나의 직업에서 더욱 절실히 배웠다. 간호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두 손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환자들은 마음이 담기지 않는 손과 말에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한다. 치료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내가 경험한 '아픈 사람'들은 마음을 더 원했다. 의학적 치료는 정말로, 정말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다. 실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받는 사람들의 빠른 회복속도를 현장에서 많이 경험했다. 아픔이라는 것은 기본적 인간능력의 상실을 불러온다. 너무 아파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뇌를 비롯한 신경계에 이상으로 인해 물리적인 언어능력 상실이 있을 수도 있고 선천적인 것으로 인해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의 해답은 언제나 마음이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 내가 볼 준비가 되어있다면 타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종합병원에서 7년간 일하던 시절 분기당 한 번씩 오시는 어느 환자분이 계셨었다. 그분께서는 실제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기에 의사전달이 매우 어려우셨다. 항상 치료에 어려움이 존재했다. 의료진이 하는 일은 비밀에 묻힌 것을 발굴해 내는 고고학 같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객관적 자료, 증거를 조합하여 알고리즘을 만들고 그 알고리즘의 해답에 도달하는 것이 진단이다. 대화가 수월하지 않았던 그분은 원하는 치료를 항상 잘 받지 못하고 가시곤 했다. -개인정보와 관련이 있기에 더 깊이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분을 간호해야 할 땐 모든 것을 총력 했다. 입모양, 손짓, 눈빛, 몸의 떨림,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아닌 소리들의 강도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전심으로 집중했다. 처음엔 많은 것들이 들리지 않았다. 사실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어느 날 불현듯 그분의 소리에서 'ㅁ'과 손짓에서 어떠한 행위를 감지했다. 나는 물이 마시고 싶으시냐고 여쭈어봤다. 그랬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시며 세차게 고개를 수십 번 끄덕이셨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날뻔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환자인지, 내가 알려고 노력하는 순간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나는 능력이라 표현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표현하고 싶다. 내가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정말로 감사함을 느낀다. 물론 실제 말을 이해받으신 분들이 더 감사함을 표정으로 표현하시곤 하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감사합니다.’가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이트 일을 하고 항상 마지막으로 찾아뵙는 환자분이 계시는데 뇌의 후천적 질환으로 인해 입술과 혀의 작용이 온전치 않으셔서 일반적인 대화는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분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불편한 곳을 묻는다. 그럼 대답을 하려 부단히 노력하신다. 그리고 나에겐 그것이 들린다. 오늘은 잠을 많이 못 잤다고 얘기하셨다. 그래서 내가 '전날에도 잠을 잘 못 주무셨는데 오늘은 어제에 비해서 표정이 좋아 보이시는 걸 봐서는 조금은 더 주무셨겠는데요?'라고 다시 질문하니 정말 해맑게 웃어주셨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닿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항상 간호사로 나이트일 하며 감사함을 가지고 일을 한다. 마음이라는 것이 상호작용을 했기에 그런가 싶다.
더 나아가 수많은 세상을 듣고 싶다. 마음 그리고 귀에 들어오는 진동과 진폭의 차이로만 발생되는 소리만 그치지 않고 말이다. 엉뚱하게 더 나아가서는 날아가는 왜가리가-달리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만나는 것이 왜가리다.- 친구 왜가리에게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하천가에 엄마오리가 따라가는 아기오리들에게 어떠한 소리를 내어 따라오게 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혹은 상처나 행복 그리고 고난과 신체의 언어까지 모두 다 귀로 듣고 담고 싶다. 지금 이상의 노력을 더 기울여 마음과 귀가할 수 있는 범위를 더 늘려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더 풍요로워지는 방식인 것 같아서. 듣기 영역은 확실히 감각의 집중으로 발생되는 고도의 기술임을 리마인드 하게 된다. 꼭 나 자신의 소리에만 집중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마음에게도, 귀에게도, 마지막 병실에 계신 할아버지께도, 이전 직장에 이따금씩 찾아오던 환자분에게도, 이런 마음을 안을 수 있게 해 준 세상에게도 많은 감사함과 기쁨을 느낀다.
이런 것 보면 삶을 적당히 살고 있음을, 삶의 방향이 망가지지 않았음을, 적당히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곤 한다. 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