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불확실한 가능성

다른 삶을 대하는 태도

by 지우

과거,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닿음은 경이로운 일이다. '닿음'이란 자연스럽지만 일으켜야 하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았으면 새로운 일은 일어날 수는 없다. 분명 무엇인가 발생했다. 분명 알지 못하는 혹은 알 수 있는 무엇인가가 시작되었고 연쇄작용으로 계속해서 발생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같이 위대한 글을 썼다는 행위와 책으로 공유되었기에 지금 시대와 닿아있는 것이다. 쉽사리 일어날 수도 없고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간단하게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엔 ‘무엇’인가가 관여된 것이다. 그 ‘무엇’은 영적이거나 초월적이거나 행동집약적이거나 나이거나 너이거나 우리일 수 있다. 인연이라는 것에는 자연스럽지만 ‘무엇’이 있다. ‘무엇’, ‘어떤’것 의 이끌림이 아닌 이상 쉽게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믿는다. 고로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고 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 또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매개체로 있던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배려, 존중. 우호적인 모든 관계 속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일어났기에 일어나는 것. 고로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기에 나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귀중하게 여긴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무엇’에 의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성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가능성이라는 것에는 정말 무한한 우주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새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손과 마음. 애정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행동과 말, 그 모든 것에 분명히 우주적인 것이 존재한다. 우주 안에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의 가능성 -누군가의 우주-을 바라본다는 것에 많은 흥미를 가진 나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성을 바라보는 기준 역시 가능성이었다. 지금의 배우자 역시 나는 그러한 기준으로 호감을 느꼈고 결혼까지 이어졌다. 이성이 아닌 동성 혹은 상황, 일에 속한 모든 사람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귀중한 작업이다. 귀중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사실 우주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나와 다른 우주이기에 배척하기 바쁠지도 모른다. 혹은 우주가 아닌 티끌처럼 여길 수도 있다.


나는 그럴수록, 모르는 관계일수록 더욱더 깊은 존중이 담겨있어야 한다. 절대로 쉽게 판단하지 않는 전제가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되 작은 순간을 놓치지 말고 담아내야 한다. 그래야 가능성이라는 것은 조금은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존재를 작게나마 어필한다. 우주탐사선을 타고 다른 은하계를 향하지만 속도를 최대한 늦춰 몇백 광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리를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파피용’에 나오는 다른 행성을 향하여 항해하는 파피용 호처럼 말이다. 유유히.


가능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우주라 표현했지만 더 적확한 표현은 불확실성에 가깝다고 본다. 나의 생生 속 경험상, 확실한 것에서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저 확실한 것. 확실한 것은 생각보다 나의 기억 속 잔상을 남기지 않았다. 확실하다는 것은 마치 구획이 확실한 국경과도 같다. 구획. 구역.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는 것. 그러나 불확실한 것은 굉장히 명료한 기억을 남겼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나사 NASA의 허블우주 망원경처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우주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게 느껴지곤 한다. 나는 불확실한 것에 담겨있는 많은 의미와 숨겨진 가능성에 계속해서 눈이 가고 계속해서 마음이 갔다. 숨겨진 것을 발견해내고 싶었고 만들어 내고 싶었고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불확실한 것에서 가능성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불확실은 어떻게 보면 확실한 것보다 더 큰 범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가르치기도 하고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나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경험했던 것이다.


가능성의 영역, 불확실한 세계에서의 가장 좋은 점은 틀린 것이 없는 것이다. 선택에 대한 결과일 뿐. 그것이 옳고 그름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판가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실수나 올바르게 되지 않은 일들이 더 길고 넓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간호사를 하면서도 다른 사회 현장에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나는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사람을 쉽게 보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굉장한 존중으로 대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하는 기본 태도인 '존중'은 모든 관계를 통솔하고 안내한다. 아직까지도 나를 기억해 주며 찾아주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하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을. 존중에는 분명히 강한 힘이 있어 어떤 것으로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행복에 가까운 일일 것임을. 존중이라는 것으로 서로의 세계에 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세계가 닿는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서로의 간격에 무거운 시간의 벽이 생겼어도, 모든 것이 연관되지 않을 공간 속에서 서로 존재하여도 나를 기억해 주고 찾아주고 사람들이 있다. 벽과 공간을 넘어 마음을 전달해 주는 타인들을 보고 있자면 분명히 '존중'에 관해서는 확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존중에서 이끌어 내어 진 불확실한 가능성 엿보기. 나는 존중을 담은 진심으로 나와는 다른 삶 대했다. 타인의 삶을 진지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닿음'이라는 것이 결국 내가 취한 태도에서 비롯된 시간적 개념 뒤엎기이다. 과거와 현재의 틈을 메워서 만남을 가지고 미래에 있을 일도 함께 꿈꾸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관계측면에서 보자면 그런 일의 기반은 타인을 존중했음을. 타인을 진정하게 대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존중에 대한 것들이 누락되어 있는 상황을 많이 본다. 그런 곳에서 나오는 감정들은 분노, 경멸, 혐오 같은 극단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그러한 감정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맑은 물에 새빨간 물감 한 방울이 떨어져 모든 색을 물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 역시 어떻게 보면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틀림으로 인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존중하는. 존중하며 적절한 감정들이 이후의 삶에서도 긍정적인 닿음이 생겨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위함과 나를 위하는 것의 접촉점일지도 모른다. 더 깊이 얘기해 보자면 '존중'이라는 것에 결과는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단순하게 나만의 노력일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분명히 나는 안다. 타인을 향한 존중은 나를 향한 존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혹자는 굳이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존중을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해내야만 하는 것. '굳이'라는 의문부호적인 문자는 나의 인생에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심을 쏟아내고 힘쓰는 것에 더 가치가 있었다. 타인을 향한 진심. 결국 나를 위한 진심이고 나를 위한 행동이고 나를 향한 존중이다. 분명하게 나는 그것에 진실로 임하고 믿는다.

결국 타인을 향한 존중은 나로부터 그리고 나로 돌아오는 것임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