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석에 들어서다.
환호성이 없는 스타디움, 나는 타석으로 들어선다. 상대는 사상 최고, 최강의, 그리고 타자들에겐 최악의 투수가 마운드 위에 올라서 있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마운드의 높이가 25cm임을 감안하여도 그 모습은 마치 골리앗이 서있는 듯 보인다. 양치기였던 다윗은 어떻게 용기를 가지고 골리앗에게 돌을 던졌는지 상상조차 안된다. 투수가 와인드 업-공을 던지기 위한 준비-을 시작한다. 공은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갈라 포수의 글러브까지 0.4초 안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저 공포스러운 공을 치기 위해 투수의 손에서 떠난 지 0.25초 안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휘두를 것인가. 참을 것인가. 파울로 만들까. 한번 더 눈으로 익혀볼까. 첫 번째 공은 언제나 그렇듯 중앙 패스트볼-직구-. 참기를 잘했다. 이것을 휘둘렀다면 쳐내지도 못하고 분명 투수의 기운에 눌렸으리라. 두 번째 공은 볼. 세 번째 공도 볼.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모두 타자를 농락하려는 투수의 유인구였다. 세 번의 참음이 나에게 안타를 안겨줄까? 조금 마음이 급해지지만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투수인 골리앗도. 타자인 나도.
투수를 응시해 본다. 투수를 압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의 눈에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집중을 한 것인지 냉철한 것인지. 물론 골리앗은 내가 쳐다보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공기가 고요하고 차분해진다. 다시 한번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난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공의 거리는 약 18m. 눈이 좋은 나에겐 공의 끝을 볼 수 있는 감각이 분명 있다. 투수의 손에서 떠난 공의 모습이 첫 번째 공과 유사하다. 투수의 모든 움직임을 수도 없이 파악했다. 오늘의 경기를 위해. 분석관이 준비해 준 경기영상을 스크리닝도 하고 이미지트레이닝도 하고 타석을 준비할 때 계속해서 투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직감이 말한다. 첫 번째와 분명히 똑같다.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나무배트로 내가 여태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행해왔던 스윙의 모션으로, 코치가 항상 얘기하던 흐름대로 배트를 휘두른다. 나의 직감대로. 배트에 묵직한 진동이 손으로 전달되었고 나의 귀에는 경쾌하고 청아한 음이 들렸다.
나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다. 수도 없이 변화하고 쉴 새 없이 꼬아진다. 360도를 돌기도 하고 좌우로 꺾이며 레일의 거친 감각이 온전하게 나의 몸속으로 반영된다. 이런 열차를 나는 고급 세단으로도 SUV로도 변하게 해 보려 평생을 노력했다. 헛수고. 계속 변하려고 노력함에도 여전하다 이 성격은. 누가 보면 롤러코스터를 사랑하는가라고 의문을 품을 만큼 심하게 탄다.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그래도 지금은 과거보다 덜 타려고 노력한다. 하루에 백번 타던 것을 하루에 열 번 정도 정도는 타는 것 같다. 바뀌었다기 보단 조금은 덜 타고 싶을 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던 시절에는 운전을 할 때에 몇십 번, 길을 걸어가다가도 몇십 번, 층간소음으로 수십 번, 정말 짜증 나게 할 때 몇십 번 티브이를 보다가도 몇십 번, 인터넷을 하다가도 몇십 번. 지속적인 기분의 오름과 내림은 나를 항상 지치게 만들었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기분의 오르내림으로 다 사용하기에 난 언제나 예민했다.
답은 있었을까.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으로 얻은 지혜는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안보는 것. 안 보고 안 듣는 것. 명백하게는 여러 스트레스요소들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보인다. 보여도 안 본 척. 들려도 안 들린 척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답이 이것밖에 없던 것이다. 정말로. 안 보아야 내가 건강해지더라. 정신이 항상 힘들고 지쳐있었기에 울컥 올라오는 화를 내가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결국 날아오는 화살을 기다란 창을 들고 다 쳐내고 있는 형국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심장으로 날아들 오는 화살을 죽지 않으려고, 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쳐내는 것이다. 다행인 것이 나의 창은 그런 것을 나름 잘 쳐내기는 한다.
그러다 보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할 것이 하나둘씩 줄어들어 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치 않기도 한다. 또 그러다 보면 하루의 기분세팅을 위한 기본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나의 기분세팅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해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에게 기분 세팅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그런대로 조금은 수월하다.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물론 다는 아니다.- 당당하게 다가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뚝딱 홈런을 치기도 한다.-가끔 병살타도 있기 마련이다.- 정말 신중히 공을 판단해 배트의 중앙에 위치시켜 다리와 중심축은 흔들리지 않은 채 배트의 스윙궤도로 그저 ‘딱!’ 쳐버린다. 가끔 스트라이크로 들어오는 녀석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그것도 그저 받아들인다. 물론 안 될 때도 있지만. 미국의 최고의 야구리그인 MLB에 날고 기는 야구선수들도 아무리 잘해봐야 10번의 타석 중 3번의 안타를 때려낸다. 그런 지표를 3할 타자라고 한다. 3할 타자면 평생을 먹고살만큼 돈을 벌 수 있다. 3할 타자란 엄청난 것이다.
여하튼 7번의 헛스윙이 있어야 3번의 안타가 있다고 보면 된다. 7번의 헛스윙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잘 보는 것이다. 면밀히 살펴보고 공을 흘리기도 하고 파울을 만들기도 하고 쳐내기도 하고 삼진도 당해 본다. 나에게 들어오는 스트라이크를. 어떤 모양으로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지 궤적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타이밍을 잰 다음 3번 정도 기회가 올 것에 안타를 만들어 내도록 노력한다. 즉, 스트라이크가 들어오는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다시 올 기회를 바라보고 학습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기분을 조절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는 일처럼 보이는데 실상 당사자는 정말 짜증 나고 미치고 팔짝 뛴다고 보면 된다. 기분이 조절 안 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무기력함을 느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기력은 참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늪으로 멱살을 잡고 끌고 들어가 목까지 잠기고 입도 들어가고 코 그리고 눈 나의 뇌까지 늪지대 안으로 들어가 숨도 못 쉬고 퉁퉁 불어 터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3할 타자가 되기로 했다. 나름의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의 뇌 속에서 만들어낸 나만의 게임이기에 나는 사실 10할 타자도 한순간에 될 수 있다. 그런데 10할이어도 그것에 꼭 안타만이 아니라 홈런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홈런을 쳐 대가며 힘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적당히 1루타정도 만든다. 달리는 것도 귀찮기 때문에. 하루의 힘을 적당히 배분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꼭 안타를 치겠다 라기 보단 툭 쳐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파울도 많이 만들어 낸다. 포수의 글러브로 들어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쳐낸다. 이것은 장기전이다. 한번 해냈다고 다음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이런 종류의 노력을 기분세팅이라고 부르겠다. 타석에 들어서는 나의 마음가짐, 그리고 꼭 쳐내야겠다는 마인드, 놓치더라도 다음 공은 꼭 치겠다는 생각. 그것으로 나의 기분세팅을 하고 타석에 들어선다. 매 순간이 나에겐 중요한 타석이다. 최종전에 들어선, 그리고 매우 중요한 타석에 내가 서있다고 생각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나의 하루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하루를 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잘 되지 않아 망쳤을지언정 몇 시간이 흐를 수도 있고 며칠이 흐를 수도 있지만 결국 쳐내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기분을 세팅한다.
딱!
공을 확실히 쳐냈다. 오랜만에 쳐낸 공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햇빛이 거세서 그런지 하늘에 있을 쳐낸 공의 위치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일단 뛰자. 몸이 말한다. 분명 배트의 감각은 중견수를 넘어설 수 있는 장타다. 묵직했던 손에 느껴진 감각을 믿어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1루를 거쳐 2루로까지 가는 상상 속에 열심히 더 열심히 다리를 움직인다. 그런데 1루를 밟고 통과하자 두려움이 앞선다. 혹시 너무 오랜만에 친 안타인데 내가 너무 과신한 것 아닐까? 아직 심판은 아웃콜을 하지 않는 것을 봐서는 공이 1루에 도착한 것은 아님은 확실하다. 불안하다. 2루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멀다. 몸이 거기까지는 무리인 것 같다며 갑작스레 신호를 보낸다. 아니 뇌가 보낸 두려움의 전기자극이 종아리근육에 작은 경련을 만들어 보냈다. 허둥지둥. 다시 1루로 돌아가야겠다. 우왕좌왕하며 몸을 돌리는데 급격한 방향전환으로 몸이 기우뚱하며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1루 베이스가 눈앞에 보인다. 기어서라도 손으로 터치하여 아웃당하지 말아야겠다. 엉금엉금. 바다를 향하여 맹렬하게 기어가는 아기거북 마냥 열심히 기어 보지만 느리다. 겨우겨우 나의 1루를 사수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1루 심판과 1루수가 나에게 무언가 소리친다. 너무 시끄럽게 두 말들이 혼합되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어서라고 하는 것 같아 유니폼에 뭍은 흙을 탈탈 털며 별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본다. 심판은 검지손가락을 들고 손목으로 작은 원을 만들며 나에게 미소를 지어준다. 계속해서 흔든다. 1루수가 나의 엉덩이를 쳐주며 2루를 가리킨다. 더그아웃에 있는 나의 팀원들도 박수를 치며 나에게 축하사인을 보내고 2루수 3루수마저 달리라고 사인을 보낸다. 마운드의 골리앗을 쳐다보니 고개를 떨구고 망연자실한 자태가 보였다.
그렇다. 내가 친 것은 홈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