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고 ‘춤춘자’와 ‘전연 얻은 것이 없다는자’

by 정태영

논어를 읽다 보면 문득 대부분 내용이 사람 살아가는 태도나 자세 등에 관한 것이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도 군주나 군자 (지식인 계층) 들의 자세나 태도 등에 관한 것이다. 일반 서민이나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같은 시대 서양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과 본 모습을 알려고 하는데 치중했다. 사실 이데아란 있지도 않는 것이지만…


주희(朱熹)가 주해를 단 논어(論語)를 1975년에 번역한 한상갑(전 관동대 교수)은 “논어의 내용을 간단히 말한다면 일상의 비근한 이륜(彛倫)을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륜(彛倫)이란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지켜야 할 도리’란 뜻이다.


좀 더, 논어 독후감이랄까 논어라는 책의 서평을 말한자는 정자(程子, 중국 송나라 때의 유학자 정자程子와 정이程頤, 1033-1107)이다. 그는 『논어』를 읽은 사람을 네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논어》를 읽고도

전연 얻는 것이 없는 자가 있고,

읽은 뒤에 그 가운데에서 한두 귀 절을 좋아하는 자도 있고,

읽은 후에 좋아할 줄 아는 자도 있고,

읽은 뒤에 곧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고 하였다.

[ 程子曰、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者 ]


나는 이 대목을 음미해 가면서 과연 논어를 읽고 난 후에 ‘춤추는 자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가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이들은 군왕이나 그 측근, 조정 신하, 유학자 같은 사대부, 즉 지배계층 등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유학의 이러한 계층질서 유지 역할은 논어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 안연편)귀절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다.” 강조가 왕조 시대의 정치질서 및 사회질서 유지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다 아는 역사적 인식이다.


이점은 서양의 플라톤이 각자의 신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의(justice)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물론 논어 같은 한문 전적을 읽는 대부분은 사대부 계층들일 것이며 정자는 이들을 분류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4분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상의 날개를 펴 당시 모든 사람들이 논어를 읽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논어를 읽고도 ‘전연 얻는 것이 없다고 한 자’는 누구일까?


아마 신분 질서에서 하층에 있는 ‘농상공(農工商)’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글도 몰라 읽지도 않았겠지만 만일 읽었더라면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요즘도 가끔 쓰이는 흔히 하는 말로 “양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먹고 살기에 힘들어 죽겠는데 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고 있네…”라며 조소를 했을지도 모른다.


더 아래로 내려가 일종의 노예 계층, 한국으로 치면 중세 근세 사회에서의 머슴이나 노비에 해당하는 계층들이 읽었더라면 이들은 분노하거나 화를 내고, 심지어는 “뒤집어 버리자”고 내심 소리질렀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의 만적(萬積) 같은 이들이 읽었더라면 “저 양반 놈들의 논어 서적을 불살라 버리자”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자 탄생 2500여 년이 지난 후 중국 문화대혁명에서는 공자 파괴 운동이 일어났지 않는가. 물론 그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내가 논어를 읽어본 소감은 주(周)나라를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는 공자의 말이나 태도가 전편에 충(忠)·효(孝)·예(禮)·인(仁) 주제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되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주(周)나라는 하.은 두 대를 거울 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도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子曰: 周監於二代,郁郁乎文哉!吾從周] (논어 팔일편)


앞서 말한 정자 자신은 논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십 칠팔세로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 이미 글 뜻을 알았으나, 읽기를 더욱 오래한 것은 의미가 깊고 긴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程子日、自十七八讀論語讀之愈久但覺意味深長] (주희 집주 논어 서문 중에서)


한편 사족이지만

조선 말기 시대에 민씨 정권에서 핵심 역할을 한 민영익은 1883년에 미국 방문 사절단장으로 즉 보빙사(報聘使:답례 사절)의 전권대신이 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방문 후 이들은 서양 문물을 살피기 위해 유럽을 돌아 조선에 귀국하였다. 그 때 이들을 수행하고 안내한 푸트 주조선 미국 공사가 배 안에서 하루종일 논어만 읽고 있는 민영익에게 서양 문물, 신 기술을 보라고 했으나 그는 계속 논어만 읽고 있었다고 한다.


논어를 읽고 그는 깊은 열(說, 기쁨)에 빠졌을 것이다.

민영익은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깊이 빠져 있었지 않나 싶다.



당시 상황을 나는 이렇게 꾸며 본다.

푸트 공사 : “민 대감, 방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와 배 만드는 공장 (조선소), 기차 만드는 공장 (기계창), 옷 만드는 기계 (방직기. 방적기) 좀 보시오”

민영익 : 묵묵 부답…..



그러나 당시 조선의 막강한 지도적 위치에 있던 그가 논어 보다는 서양 문물을 배 안에서 메모하고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하고 서양 문물을 읽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민영익은 민태호의 아들이었는데, 당시 민씨 척족의 수장인 제일 권세가 민승호(민비의 양오라버니)가 배달된 폭탄 상자를 열다가 폭사당한 후 그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는 이후 승승장구해 민비의 총예를 받으며 민씨 가문을 대표해 권세가의 맨 앞에 올랐다. 그는 초기에 온건 개화파가 되어 앞서 말한 1883년 미국 보빙사 단장으로 서양 문물 여행을 했다.


그러나 개화파와 갈등을 빚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 낙성식 연회에 참석했다가 김옥균 일당의 칼을 맞고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로 기적적으로 소생한 바 있다.

이후 그는 조정에 주요 관직을 역임하다가 1895년 민비가 시해되어 주요한 정치적 후원자가 없어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내내 그곳에서 지내다 상하이에서 1914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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