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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ist Jun 20. 2023

00. 마이너스 통장이 아닌 마이너스 인생

0 이하의 인생을 사는 기분


 내가 처음 마이너스 통장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한의대에 온 후이다. 한의대생은 본과 3학년 이후로 '마통'을 몇천만 원 정도 낮은 금리로 받아낼 수 있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듣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내 인생이 앞으로 잘 굴러가겠구나 막연한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의대에 온 이후 내 인생 내역은 계속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내 인생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굴곡은 있었지만 꽉 찬 삶을 살았다. 말로만 듣던 엄마 친구의 공부 잘하는 딸이 바로 나였다! 학교에서는 꼭 수업을 들었고, 쉬는 시간에는 예복습을 하고, 점심시간까지도 문제집을 풀었다. 취미는 독서였고 기분이 우울하면 일탈로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상이지만 그때는 그 생활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중간중간 행복하기까지 했다.



 결국에 문과에서 한의대까지 오고 행복한 미래만 있을 것 같던 내 인생은 지금 최고의 암흑기이다. 새로운 책을 읽지 못한 지 한참 되었고, 서점에서 재미있을 것 같아 사온 책은 방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간다. 이제는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도 잘 보지 못한다. 이미 본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 넘게 다시 보고,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만 본다. 새로운 콘텐츠를 보지 않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다. 도저히 새로 무언가를 접할 에너지가 나지 않아서 늘어져만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엄마와의 통화 때였다. 엄마는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이 있냐고 물으셨고, 내가 없다고 답하자 너 요즘 책 안 읽는구나 하고 말했다. 질책조도 아닌 그냥 너 그렇구나. 그런데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와서 나 요즘 책 안 읽는 거 아니고 못 읽는 거라고. 그럴 힘이 없다고. 한참을 말하다가 내 인생이 요즘 마이너스 통장 같아!라고 거의 소리를 질렀다.



 엄마에게는 사과했지만 그때 정말 완벽한 단어를 찾은 것 같았다. 마이너스 통장. +는 없고 -만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어쩌다 기분이 나아져도 마이너스고, 아주 행복해져도 0인 기분. 그래서 도저히 새로운 책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이너스가 된 내 행복을 0까지 빠르게 채우려면 인스턴트 콘텐츠가 필요하고, 책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면서 에너지도 들어가니까.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밀려난 걸까? 





 고등학교 때의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목적이 분명하고, 끝날게 분명한 일상을 살고 있었으니까. 나에게 있던 100의 행복 적금을 조금씩 쓰면서, 가끔 책으로 1씩 채워 넣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너무 최선을 다한 거다. 나의 잔고는 0이 되었고 이걸 다시 채워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세상은 굴러가고, 나는 그에 발맞춰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열었고, 내 잔고는 0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놀기만 하면 지겨워질 거라고 말한다. 분명히 지칠 때가 올 거라고. 그런데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다. 놀다가 지치는 것. 인생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원할 때까지 누워있다가, 다시 새로운 책을 볼 힘을 얻는 것. 그리고 내가 놓친 책들을 읽고 놓친 영화를 보면서 내 행복을 100까지 채우는 것. 그래서 좀 힘내서 다시 인생을 살아볼까, 싶을 때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것.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중간에 그만두거나 옮길 수는 있어도, 결국 다시 일을 하게 된다. 진짜 어른이란 건 그런 걸까? 잠깐의 휴식만으로도 다시 통장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아니면 다들 나처럼 열심히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는 걸까? 만약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거라면 사람들은 이 행복이 양수가 되지 않는 기분에도 익숙해진 걸까? 나도 언젠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여기 22살의 나는 너무나 버겁다. 확실한 건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할 때가 나에게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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