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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성 May 05. 2023

일본 소도시 기행 : 마쓰야마 1

시코쿠의 정취

호텔에서 내려다 본 마쓰야마 성과 해자의 풍경

 4월 말 마쓰야마에는 서울보다 더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예약한 시내 호텔로 이동하는 길, 우산으로 가려지지 않는 캐리어가 젖는 것보다 신고 온 얇은 운동화에 물이 들까 조마조마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길었던 코로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하늘길이 열린 지도 1년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물론 엔데믹 후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지난 연말, 연초 짧게 짬을 내어 중화권의 몇몇 도시에 갔다. 누차 가본 도시들이어서 그럴지, 아니면 일상의 단조로움에 내 감성이 무뎌졌기 때문인지, 별다른 감상이 일지 않았다. 여행에 있어 여행지는 그저 맥거핀일 뿐이기에, 내 감상의 부재는 8할 이상 후자일 탓이 컸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서글펐고, 여행은 귀찮아졌다. 당분간은 일상의 소확행에 집중하며 무디어진 감성의 칼날을 벼릴 생각이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한 중학교 동창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다른 친구에게도 청첩장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별일 없으면 가는 것이겠지만, 그러기엔 직장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연휴였기에, 그 동창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가기로 했다.

 다시 스카이스캐너 앱을 열어 여행지를 검색하면서, 한동안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나도 웃겼다. 이렇게 짬만 나면 떠날 궁리를 하니, DNA에 각인된 역마살은 결국에는 누를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연휴이기에 표가 많이 비쌀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았고, 시간대와 가격이 모두 괜찮았던 마쓰야마에 가기로 했다.

 코로나 직전 마지막으로 갔던 가고시마와 미야자키의 기억이 너무 좋았다. 중국이나 동남아의 너저분한 분위기와는 또 다른 정갈한 분위기와 내 안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 먼 길을 돌아 결국 내가 바랐던 풍경으로 찾아들어왔다고 느낄 정도로 좋았던 기억에, 앞으로는 짧게 시간을 내어 일본의 소도시들을 둘러보자 계획했었다.

 그렇게 삼 년의 시간이 지나갔고, 이제는 전과 같지 않은 체력과 감성으로 다시 일본에 왔다. 체 게바라는 그의 남미 여행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같은 풍경을 봐도 달리 느껴지는 것은 결국 내가 달라진 것이라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적어두었다. 부잣집 막내 의대생이 여행을 마치고 비로소 혁명의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한 문장인데, 나는 내 식으로 그저 일상의 굴레에 변해버린 내 자신을 푸념할 때 그 말을 인용하곤 했다. 나는 분명 과거 내 모습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었나 보다.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비 오는 거리로 나섰다. 제법 굵은 비줄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텔 주변이 번화가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거리를 걷다가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고, 가게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 메뉴판도 없었지만, 그냥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로 보이는 음식을 두 개 시키고, 아사히 비루를 한 병 달라고 했다. 어디서나 그렇듯 여행지에서 언어로 인한 제약은 거의 없다. 다만 지금껏 중화권을 자주 다녔기에 말이 통해 조금 더 편했을 뿐이고,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 못하기에 조금 더 불편할 뿐이다.

 우리가 시킨 것은 한국에서 일명 '도미밥'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공교롭게 먹는 방법이 따로 이쓴 음식이었고, 더 공교롭게 한국어를 좀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어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먹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냐니깐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고 했다. 이 가게에 한국인 손님들이 자주 오냐니깐 처음이고, 한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써보는 것도 처음이란다.

 도미밥은 밥 위에 도미회와 간장소스, 와사비, 날계란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이었다. 회도 신선하고 밥맛도 좋았기에 반주삼아 아사히를 한 병 더 비우고, 산토리도 한 병 더 시켜 먹었다. 식당을 나서자 빗줄기가 많이 얇아져 있었고, 호텔 가는 길에 있던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일본 특유의,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고, 담배냄새 짙게 배어있는 술집. 아직 이른 시간이라 우리가 개시 손님인 듯했고, 야키토리를 하나 시키고 하이볼-사케-소주로 술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중국을 여행할 때도 그 지역의 전통주를 마셔보는 것은 내 여행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다. 코로나 시대 국내를 돌아다니며 지역 술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컸다. 집집마다 술을 담그던 술의 나라의 명맥은 끊기고, 전국 어딜 가나 똑같은 초록색 병에 담긴 희석식 소주. 그나마 그 지역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면 지역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를 살 수 있다.

 일본이 술 덕질하기도 좋은 곳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이 술집에서도 지역의 사케를 4종 구비해두고 있어 잔 술로 시켜 모두 마셔보았다. 중국의 백주처럼 도수가 높지 않아 미묘한 맛의 차이를 비교하며 시음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로컬 사케를 한 병 더 사 와사비 과자를 안주삼아 호텔에서 한 잔 더 기울였다. 전날까지 빡빡했던 일상을 보상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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