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莫高窟). 둔황에 오는 사람들은 꼭 막고굴을 보러 간다. 아니, 사람들은 막고굴을 보기 위해 둔황에 온다. 우리에게는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석굴은, 둔황을 대표하는 유적을 넘어 실크로드 전체를 대표하는 유적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내심 막고굴을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의 석굴 문화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이르러 찬란하게 꽃 피우게 된다. 중국 내 현존하는 석굴 중 따통(大同)의 운강석굴(雲崗石窟), 뤄양(洛陽)의 룽먼석굴(龍門石窟), 둔황의 막고굴이 3대 석굴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막고굴을 학술적으로나 보존 상태, 유명세 등등에서 가장 높게 친다. 나는 운 좋게 세 곳의 석굴을 다 가보았는데,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각각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통 운강석굴의 석상들은 북방민족의 웅장하고 호쾌한 기개가 느껴진다면 수, 당 황실의 지원으로 조성된 뤄양 룽먼석굴의 불상들은 그 비율이나 조형미가 특히 뛰어났다. 그리고 이곳 막고굴의 벽화나 불상들은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았고, 색감이 주는 화려함에서 으뜸이었다.
따통 윈강석굴 (운강석굴)
뤄양 룽먼석굴 (용문석굴)
막고굴은 하루 관람 인원을 제한한다.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30분 간격으로 50명의 사람들만 가이드를 따라 들어가 가이드가 열어주는 몇 개의 석굴만을 볼 수 있다. 입장료는 4개의 석굴을 보여주는 일반 관람이 100원(우리 돈 18,000원), 8개의 석굴을 보여주는 특별관람이 200원(우리 돈 36,000원)으로 억 소리 나게 비싼데, 여름방학 같은 성수기에는 이렇게 비싼 가격에도 표를 구하기 어려울 때가 다반사이다. 심정 같아서는 남은 일정을 모두 여기에 때려 박아 735개 석굴 하나하나를 다 뜯어봐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뭐 별 수 있나, 울며 겨자 먹기로 거금을 들여 특별관람권을 샀다. 다행히 학생 할인을 받아 100원에 표를 살 수 있었다(중국에서는 대학생을 포함한 모든 학생이 학생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관광지의 입장료가 원체 비싼지라 반값의 학생 표가 꽤 요긴하다. 외국인 유학생은 적용이 안 되는 곳도 있어 빡칠 때도 있지만).
막고굴. 옛날에는 위 사진과 같은 목조구조물이 모든 석굴 전면에 다 있었다고 한다
막고굴 전경. 막고굴은 내부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해 외부 사진밖에 없다
한 석굴에 머무르는 시간은 1~2분 남짓. 가이드가 뭐라고 떠들던 잘 들리지도 않으니 무시하고 최대한 많이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너무나 훌륭했다. 보존도 너무나 잘 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내 감흥을 더욱 증폭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여덟 개의 석굴을 주마간산으로 훑은 게 너무 아쉬워 가이드에게 다른 팀에 껴서 못 본 석굴들을 좀 더 둘러봐도 되겠냐 물어보니 편할 대로 하란다(관람하는 석굴은 앞선 팀 등을 고려해 가이드가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몇 개 못 봤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쉬운 대목.
다음날은 핀처를 타고 둔황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옛 유적들을 보러 다녔다. 이곳 둔황 주변에는 옛 국경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나라 때까지 국경 관문 역할을 하던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이다.
둔황 고성. 옛 둔황성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역시나 별 감흥은 없다
둔황 고성
천불동 석굴. 역사는 막고굴보다도 오래되었지만 역시나 예술적 가치는 떨어진다
역시나 복원된 양관 관문의 모습
꽤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는데, 관광객 유치용으로 깔끔하게 복원해놓은 둔황 고성이나 양관 관문은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니니 패스. 역시나 내게서 감흥을 이끌어 내는 건 오랜 세월 풍파에 찢기고 무녀 져 겨우 흔적만 남았지만 그래도 아직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었다.
복원된 양관 서북쪽 황량한 땅에 작은 봉화대 하나가 서 있다. 한나라 때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니 2000년이 훨씬 넘은 것이었다. 옥문관에는 더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남아있다. 옥문관 관문 자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한나라 때 군사 주둔시설로 쓰였다는 그 구조물은 문의 흔적은 물론 짚과 황토를 섞어 쌓은 네 벽이 온전히 남아있다.
양관 봉화대
양관 봉화대
옥문관 군사 주둔지 유적
옥문관 군사 주둔지 유적
유적 내부의 모습
벽의 구조가 완벽하게 남아있다.
나는 옛 것을 좋아한다. 오래된 것들은 항상 내게 감흥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한대장성. 한나라 때의 장성 유적인데, 흙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한대장성
한대장성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도 물론 좋아하지만, 더 좋은 건 역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세월을 맞으며 그대로 있는 것들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지만, 시간은 점점 그것을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만든다. 점점 배경에 녹아든다고 표현하면 적절하려나. 자연과 인공의 위화감은 사라지고, 인간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진리를 설파하는 듯 점점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 기둥 없는 주춧돌, 빛바랜 단청, 깨진 석불, 무너진 성벽....... 그리고 여기 이 변방의 저 흙벽.......
야단지질공원
야단지질공원
야단지질공원
야단지질공원
야단지질공원
야단지질공원
그날의 마지막 일정은 야단 지질공원(雅丹地質公園)이었다. 바람에 의한 부분 침식으로 형성된 지형이었는데, 칭하이(青海)와 간쑤(甘肅) 북부, 신장(新疆) 남부에 걸쳐 이런 지형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한다. 풍화된 지형이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어떠한 인간의 흔적도 없는, 지평선까지 넓게 펼쳐진 광야(廣野)를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 장관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며 열하일기(熱河日記) 호곡장(好哭場)의 구절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였다.
광야를 바라보며 그냥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그 생각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곳에 불던 바람의 촉감만은 선명히 남아있다.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저 지평선 끝까지 걸어가 보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밤이 다 되어서야 둔황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가 갑자기 도로변에 서더니 기사 아저씨가 모두를 내리게 한다. 어리둥절하며 내렸는데, 와,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진다. 기사 아저씨는 모두의 휴대폰을 끄게 하고는 머리 위로 보이는 별자리를 하나씩 설명해 준다. 졸린 눈을 비비며 짜증스럽게 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눈이 사막의 별 보다 더 빛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