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야!
이번 글은 에필로그 와 책 표지입니다.
실제 기안된 표지 부분입니다. 너무 마음에 듭니다. 전체 디자인과 제목은 출판사 작품입니다. 작가 소개는 제가 쓰고 완성했습니다. 뒷면 문구는 책 속에 있는 내용을 출판사에서 요약했습니다. 책을 쓴 의도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척 예민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문구 하나하나 출판사를 괴롭혔습니다. 미안해집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잘 모르고 무턱대고 주장한 것들이어서요.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됩니다. 그래야 철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하재윤 배상. 책은 전체 311 쪽입니다.
책을 쓰면서 지나간 일기장을 계속 들춰보게 되었습니다.
2018년 7월 3일 저녁 9시경에 태풍 쁘라삐룬이 부산을 지나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태풍으로 배송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재고를 넉넉히 두시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저 같은 쌀장사에게 태풍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바람에 배달이 힘들기도 하겠지만 태풍 자체가 직접적인 재난이 될 수도 있고 사고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일기에는 긴장한 마음으로 트럭을 몰던 날 아침에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는 멘트가 나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는 말은 로런스 피터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가 남긴 명언입니다. 요기 베라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어 있으면서 그의 등번호 8번은 뉴욕 양키즈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1973년 시즌 중반, 요기 베라는 뉴욕 메츠 구단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그해 뉴욕 메츠는 시즌 꼴찌를 달리고 있었지요. 한 기자가 요기 베라에게 물었습니다.
-올해 시즌은 끝난 건가요?"
요기 베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일기장 속 나는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살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살아온 길’이나 ‘내 처지’, ‘자화상’ 이런 말들이 생각난다.”
태풍 예보를 받은 날, 비바람을 뚫고 트럭을 몰고 쌀포대를 날라야 하는 쌀장사의 마음이 무척 심란했던가 봅니다.
에필로그를 쓰고 있는 지금은 2022년 9월입니다.
부산시 해운대 인문학 도서관에서 윤동주 평전(송우혜, 푸른역사)을 빌려 읽은 적 있습니다. 윤동주의 , ‘길’입니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재학 시절. 1941년 9월)
여기서는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시인의 갈등이 보이고 참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결연한 결기가 느껴집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에서 소개한 윤동주의 다른 시, ‘새로운 길’을 소개합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1938년 5월 탈고.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
윤동주 시인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았습니다. 시인은 단 한 줄기 희망조차 없었던 시절에도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는 길에서 새로운 내일을 찾아 번뇌합니다.
신경림 시인은 윤동주의 ‘새로운 길’을 읽고 비로소 힘을 얻어서 전쟁 통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동무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신작로와 논둑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 215쪽)
저 역시 윤동주의 시에서 다시 살아가야 할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자영업자의 길은 참으로 험난합니다. 옳은 길을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정해진 옳은 길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제 같기도 하고 오늘도 같기도 한 언제나 비슷비슷한 길을 지나오면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어쩌다 한 번 씩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큰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나와 같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힘을 얻습니다. 새벽녘 출근길에 도로 위를 밝히며 줄지어 달리고 있는 트럭들의 모습에서, 어둠을 뚫고 트럭을 몰고 있는 운전수의 실루엣에서, ‘아, 저 사람도 나처럼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하는구나!’ 하고 힘을 얻습니다. 그들의 밝은 내일을 읽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고 나는 나의 또 다른 자화상을,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의 자화상을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자화상은 무슨 색깔입니까?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1938년 9월 탈고.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
우리 시골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하고 우물을 들여다보며 논 적 있습니다. 둘러 선 친구들의 얼굴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어느 듯 중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물을 들여다보면 어떤 얼굴일지 모르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우물 속의 사나이’가 마치 저를 두고 쓴 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윤동주 시인처럼 제 자신이 미워졌다가, 가여워졌다가 또 그리워집니다. 내 얼굴 옆에 같이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얼굴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잘 살아왔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기도 합니다.
생전에 어머니께서는 외동으로 고이 키운 아들이 장사꾼이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장사꾼 돈은 개도 안 물어간다는데.. 천대 받는 장사꾼이 된 아들이 안쓰러우셨던 것이지요.
나는 21년 차 쌀장사입니다. 인생은 느닷없고 황당했습니다. 그동안 ‘외롭고 쓸쓸한’ 장사꾼으로 살아왔습니다. 쉰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높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가 쓴 자작시입니다.
콩깍지
그리움은 목메여 지쳐가다
먼 곳에서나마 그리운 이가 있어
소망은 그 어느 곳에서나 있음을 안다.
하나뿐인 그대이기에
어둠이 찾아오면
비를 맞는 천사처럼
끝을 향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빛나는 생명수를 던져준다.
언제나 사랑을 나누어가지는
그대와 나는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하는
콩깍지 속의 콩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콩깍지 속의 콩알처럼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외롭고 쓸쓸하기 만한 존재가 아닌 높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거든요.
"이 책을 나의 아들 하대에게 바친다."
since 2001, 행복한쌀창고.
부산에서 하재윤 배상.
-by 하재윤-
제목: 나는 쌀장사가 천직이다.
부제: 20년자 자영업자가 던지는 삶과 미래에 대한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