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주: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강유剛柔
아호, 내강외유. 너는 정녕 그러하냐?
고향마을 근처에 수발사(修鉢寺)라는 절이 있다. 대웅전 건물 아래 4개의 큰 기둥이 있다. 각 기둥에 큰 현액이 걸려있다. 글씨는 선친의 필력이다. 선친께서는 마을 이장을 하고, 동네 아이가 커서 장가갈 때면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써 주면서 농사짓고 살았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자주 찾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를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이 찰나인데 이렇게 초야에 묻혀서 이름 없는 풀처럼 살다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중학생쯤 되었을 때 선친께서 아호를 주셨다. 강유(剛柔)다. 선친께서는 붓글로 직접 글을 쓰시고는 뜻을 설명했다. 내강외유(內剛外柔)에서 따왔다. 내 나이 열대여섯, 건성으로 들었다. 고리타분했다.
- 아부지, 아호는 무슨 아홉니꺼, .
아호, 강유는 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았다. 한동안 내가 그런 아호를 가졌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을 만큼 기억의 저편 너머에 있었다. 그런데 마음속 아호 강유는 의외로 생명이 길었다. 자영업자로 살면서 속상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강유를 기억한다. 나는 선친이 살아온 대로 겉은 부드럽고 내면은 강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장사를 시작하고 5년 뒤,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선친이 작고하셨다.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한심하기로 치면 아버지보다 내가 더한 처지가 아닌가.
내가 쌀가게를 갓 열었을 때 안락동 충렬시장에서 쌀, 콩, 메주 등을 팔던 할아버지가 계셨다. 일흔이 조금 넘어 보이셨다. 평생을 재래시장에서 장사일로 보내신 분이었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갓 장사를 시작한 새파란 청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평생을 장사일로 보내고서도 코딱지만한 가게에서 저모양인가. 평생을 저렇게 꼬물거리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가 말이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가게로 나와서 꼼지락꼼지락 부지런히 움직였다. 체구가 150cm에도 못 미쳐서 88이라고 불리는 작은 오토바이에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작업복으로 입고 있는 바지는 예전에 입던 양복바지인 것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누가 말을 걸면 웃음기부터 먼저 머금는다. 신기하다. 마치 하얀 습자지에서 밑그림이 떠오르듯이 무표정한 얼굴에서 주름 자국이 먼저 피어오른다.
점심 무렵이면 부인께서 나오신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 같이 장사를 한다. 퇴근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할머니를 태운다. 집이 재송동인데 큰 도로가를 달려야 한다.
우연히 할아버지 오토바이 뒤를 따라가게 된 적 있다. 작업복 대용으로 입는 양복바지 밑단은 양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발목이 불룩하다.
신기하게도 오토바이는 넘어지지 않고 잘 달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함께 타고 달리는 오토바이처럼 넘어질 듯하면서 넘어지지 않고 사연 많은 세월을 살아오셨을 것이다. 장사일을 하면서 아들, 딸 키우고, 학교도 보냈을 것이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아이들 도시락을 열 개는 쌌을 것이다.
선친이 보낸 세월, 충열시장 할아버지의 세월, 그리고 내가 보내고 있는 세월. 이름 없이 사라지는 세월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사람을 키운다. 세월을 보내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장사일로 보낸 세월에서 철이 든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 것인가. 그 세월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바로 강유(剛柔)의 마음이다. 강유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순간을 슬쩍 흘려보내가 한결 수월하다.
내강외유한 사람은 유연함과 절제된 감정으로 융통성을 가진다. 항시 부드러운 언행이다. 예의와 겸손을 안다.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인내와 지혜는 강인함으로 나타난다. 위기에 처해서는 굳센 기개를 보인다. 앞을 내다보는 슬기와 지혜로운 안목으로 채워진 합리적인 사람이 강유(剛柔)한 사람이다.
이름 없는 민초들은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땔감을 주우면서 살아왔다. 이름 남기기를 원치 않는다. 들녘에 핀 한 줄기 풀꽃이 될지라도 내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강외유의 기본이다. 글을 써놓고 보니 나와는 한참 동떨어진 이가 너는 정녕 그러하냐고 묻고 있다.
- 너는 정녕 그러하냐?
글쓴이의 말:
브런치 선배 작가님들, 제가 엉겁결에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쌀장사로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선인세 967,000원을 받고 말습니다. 초고 글자 수로 보면 총 230쪽 내외 입니다. 10월 말 전후에 출간 예정입니다. 출판사와 수정보완 작업 중입니다. 수정된 파일이 오고간 것이 3번째입니다. 쓰는 것보다 탈고가 너무 힘~~드~~네~~요~~~~!